항목 ID | GC00401294 |
---|---|
한자 | 宣化堂 |
영어음역 | Seonhwadang Hall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장기경 |
성격 | 관청건물 |
---|---|
건립시기/일시 | 조선시대 |
소재지 주소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관청 건물.
[개설]
원래 관찰사는 각도에 1명씩 임명했던 조선시대의 지방장관(종 2품)을 말하는데 관찰사를 다른 말로 ‘감사’라고도 불렀기 때문에 관찰사가 있는 관청을 ‘감영’이라고 했다. 경상도관찰사는 조선시대 내내 대구(달성) 등 경상북도에만 주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상남도에는 없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 경상도가 남북으로 나눠진 후 관찰사가 진주에도 주재하면서 경상남도의 도정 역사가 새롭게 시작됐던 것이다.
예로부터 진주목으로 이름이 높던 진주에 1896년 4월 13일 경상남도(당시 이름은 경남관찰도)란 지방행정구역이 설정됐다. 이에 진주성에는 경남도청(관찰부청 또는 관찰사청이라고 부름)이 들어서게 되고, 관찰사(지금의 도지사) 집무실인 선화당에서 관찰사가 도정업무를 보게 됐다.
[명칭유래]
선화당(宣化堂)은 원래 경상도 우병영(경상남도와 경상북도의 낙동강 서부지역을 총괄하던 육상방어기구)의 관청이었던 ‘운주헌(옛 이름은 관덕당)’인데 우병영이 폐지되고 관찰사가 부임하면서 선화당이란 명칭으로 바뀌었다.
[위치]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 북장대 남쪽의 대지가 선화당이 있었던 자리이다.
[변천]
선화당은 일제 초기 경상남도의 도정을 담당하다가 1925년 4월 1일 진주 지역민들의 거센 반대 속에 와타[화전순] 경남도장관이 부산으로 떠난 뒤인 1925년 4월 17일 당시 부산부 중도정 2정목에 소재한 연와조 2층 건물로 도청이 전격적으로 개청됨으로써 1896년 이래 도청사로서 사용된 선화당의 용도가 마침내 폐기됐다.
1997년 9~10월까지 국립진주박물관이 선화당 복원부지 발굴조사에 착수함으로서 그 실체가 확인되었다.
[현황]
지금 선화당 터에는 수십개의 비석들이 서 있는데, 이는 1970년대 시작된 진주성지 정화작업 때 지역에 흩어져 있던 조선시대와 일제 때의 각종 공덕비를 이곳에 집합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비석군 주위에는 1990년대 초에 이전해 놓은 진양하씨 재실이 있다.
[의의와 평가]
국립진주박물관의 발굴조사로 밝혀진 진주성 선화당은 진주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며, 심도 있는 고증을 거쳐 복원정비계획이 이루어진다면 사적지로 정비할 가치가 충분한 유적지이다. 선화당 부지는 국립진주박물관에서 1998년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기초석 등이 확인됨으로써 그동안 확실한 위치를 몰랐던 진주성 선화당의 실체를 확인하였으므로 충분한 고증을 거친 후 복원정비계획을 수립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