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11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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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社會主義運動 |
영어의미역 | socialism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집필자 | 최소영 |
[정의]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진행된 각종 민족운동 및 사회운동.
[개설]
1917년 10월의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면서 당시 제국 열강의 식민지 사회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급속하게 유입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일부 단체 및 조직과 사상가들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사상의 근거로 삼았다.
이러한 분위기 아래 1923년 경상남도 진주에는 ‘형평사(衡平社)’가 조직되었고, 가장 천대를 받던 신분인 백정 집단의 인권 존중과 신분 해방을 주창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형평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일어난 대표적인 사회주의 운동으로 ‘신분해방’을 넘어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이후, 조선을 비롯한 중국, 인도 등의 식민사회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1919년 3·1운동 러시아와 지리적으로 인접한 우리나라에도 그 영향은 매우 컸다. 게다가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레닌이 약소 민족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함에 따라 일부 민족 지도자들이 사회주의자와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리고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이 결성되기도 하였다.
[사회주의 운동의 전개]
계급적 차별을 철폐하고 만인이 평등하게 살자는 이념적 기조 아래, 사회·경제의 다방면에서 이들 사상은 전파되었다. 특히 청년, 농민, 노동자의 투쟁과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존의 사회운동 노선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민조주의 노선과 사회주의 노선 사이의 갈등이다. 이러한 이념적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의 형평운동]
1923년 4월 24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직된 형평사는 처음에는 백정 집단의 인권존중과 신분해방을 주창한 형평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전통사회의 불평등한 신분질서를 청산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강조하는 근대 사회로 넘어오는 길목에서 일어난 현상이다.
한편 형평운동은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전국적으로 가장 오래도록 지속된 사회 운동이었다. 1935년에 ‘대동사(大同社)’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한 시기를 제외하고도, 1923년부터 1935년까지 지속되어 온 단일 조직에 의한 운동으로서의 의의가 있다. 그 과정에는 억눌린 민족 상황이 뒤얽혀 작용하였으며, 새로운 사회 질서를 만들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형평운동의 사회주의적 전개]
1920년대 중반 이후 형평운동의 관심은 좁은 의미의 ‘신분 해방’에서 벗어나 ‘민족 해방’과 ‘계급 해방’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것은 자연히 형평사 지도자들 사이의 이념적 긴장을 야기하였다. 초기부터 형평운동을 주도하며 헌신해 온 지도자들은 ‘신분 해방’에 강조점을 두고자 한 반면, 1920년대 중반에 총본부의 지도 세력으로 부상한 급진적인 소장 활동가들은 ‘계급 해방’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립은 1931년 ‘해소론(解消論)’ 파동에서 극명히 드러났는데, ‘형평사가 오히려 계급운동에 방해가 되므로 발전적 해체를 통해 대중적인 새로운 노동조합을 결성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나 지도부에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의의와 평가]
사회주의 운동은 일제강점기의 혼란스러웠던 우리 민족의 실상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경상남도 진주의 형평운동에서만 보더라도 이들 사상과 투쟁노선의 차이에 있어 갈등이 첨예하였고, 광복 이후의 해방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전개된 운동을 통해 기존의 불합리했던 신분질서가 바뀌고 인권에 대한 존중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혼란의 와중에 건져낸 값진 성과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