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1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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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反衡平運動 |
영어음역 | Banhyeongpyeong undong |
영어의미역 | Anti Social Equality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황윤희 |
[정의]
경상남도 진주지역에서 형평운동에 반대하여 일어났던 운동.
[개설]
1923년 백정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형평운동은 백정에 대한 신분차별을 사회적 관습으로 여겨오던 반대 세력들과의 충돌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사회의 오랜 전통과 관습으로 인해 진주에서 형평사 발기(發起) 직후 열린 축하연에 기생(妓生)도 나가지 않았으며,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동자·빈민까지도 형평운동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여전히 학교에서는 백정의 자제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신분해방을 주장하는 백정과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평민 간의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다.
[내용]
반형평운동은 진주에서 제일 먼저 나타났는데, 진주에서는 1923년 5월에 형평사가 발기된 직후 약 2,000여 명의 농민들이 형평사를 해산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와 같이 반형평운동의 선봉에는 진주지역 24개 동·리의 농민들이 있었다. 농민들은 각 마을마다 설치되어 있던 농청에 모여서 백정들의 차별 철폐운동과 이를 돕고 있는 일부 진주 양반 지식인들을 몰아내자는 결의를 하였다. 각 농청에서는 대표자를 뽑아 진주로 보냈으며, 진주에서는 각 농청 대표자들이 모여 형평사 반대결의를 단행하였다. 백정들의 조직을 압박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쇠고기 불매운동이라고 판단하여 농민들은 집회를 통해 우육불매동맹(牛肉不買同盟)을 맺었으며, 형평운동을 후원한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에 대한 배척 등을 결의한 뒤 본격적인 반형평운동을 벌였다.
1923년 5월 24일 오후 수백 명의 농민들이 진주 중심가에 모여 ‘형평사 공격’, ‘새백정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시위를 벌였다. 이들 농민들은 제일 먼저 강상호의 집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새백정 강상호’를 외치면서 집을 포위하고 돌을 던졌다. 대문을 부수고 집안으로 난입하지는 않았지만 돌에 장독이 박살나고 집안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강상호는 거의 날마다 진주를 떠나 있어서 강상호와 직접 충돌하지는 않았지만 식구들은 무서워서 집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 채 여러 날을 집안에 갇혀 지내야만 했다. 신현수와 천석구의 집도 공격을 받았으며, 이학찬의 집도 공격 대상이었다. 강상호의 집이 농민들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옥봉 백정들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강상호 집을 지켜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강상호의 집 대문 안팎을 지키기도 했다.
이와 같이 진주지역 농민들이 느닷없이 형평운동을 반대하고 나선 것은 은밀한 배후 조종을 받은 일부 농민들의 불순한 선동에 따른 것이었다. 반형평운동에 동원된 농민들 대부분이 특정 지주들의 토지를 소작하고 있거나 머슴살이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계가 달려 있는 토지의 지주들로부터 백정들의 조직을 반대하라는 협박을 받았다. 이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소작인과 머슴들을 반형평운동으로 내몰았던 지주들은 당시 강달영이 주도하는 진주노동공제회로부터 소작인을 탄압·수탈하는 지주들로 지목을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당시 진주노동공제회에는 박진환, 김재홍, 심두섭, 정준교, 강상호 등 진주지역을 대표하는 양반 지식인이자 재력가들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진주의 정신적 지주들로서 진주노동공제회 활동으로 일반 지주들로부터 경계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형평사 본부에서는 반형평운동에 맞서기 위해 결사대 조직을 공식 선언하는 등 강경노선을 펼쳤으나 경찰의 제지로 해산되었다. 이로써 반형평운동은 일단락된다. 반형평운동이 조직적으로 확산되지 않은 이유는 지역적인 수준이나 전국적인 수준에서 사회 여론을 주도하던 사회 운동가들이 거듭 형평운동의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 형평사원들과 반대 세력 사이를 중재하고 형평 운동에 대한 적대 감정과 신분 갈등 의식을 불식시켰기 때문이다.
[의의와 평가]
오래된 억압과 차별 속에서 백정의 신분해방 운동은 당시 사회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백정들 스스로 자신의 처지와 신분에 대한 부당성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던 백정들의 의식과 태도 변화에 있었다. 또한 백정들과 일반인들 사이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또 그것이 조직적으로 확산되지 않았던 이유는 사회운동 세력들의 중재와 지지 노력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