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04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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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柄琥 |
영어음역 | Kim Byeongho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산청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형목 |
[정의]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생애]
1915년 5월 26일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났다. 산청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29년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현 진주고등학교)에서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진주에서 살았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동맹휴교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이진하(李鎭河) 등 동료들과 식민교육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1978년 11월 23일 향년 6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활동사항]
1930년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 2학년 재학중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동맹휴학을 계획하여 동료 학생들과 함께 1월 16일 선전전단 작성에 대하여 협의한 후 동지들 규합에 나섰다.
1월 17일 아침 조회가 끝나자, 조방제(趙邦濟)는 연단으로 올라가 “우리도 조선 전반의 학생과 행동을 같이하자.”고 외친 후 삼세 삼창으로 기세를 올렸다. 이를 신호로 이웃 진주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동참하는 등 시위대는 500여 명으로 급증하였다. 시위대는 시내를 돌면서 ‘노예교육 폐지’, ‘경찰의 학내침입 금지’, ‘광주학생 석방’ 등의 구호를 외쳤다. 오후 2시경에는 진주제일공립보통학교 400여 명도 동참하는 등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1월 18일에는 진주제일공립보통학교와 시원(柴園)여학교도 동맹휴학을 단행하는 등 식민교육에 반대하는 열기로 가득찼다.
진주농업학교와 연대를 모색하던 1월 28일경 김병호는 진주읍내로 진출하여 시위를 벌이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3월 1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주거침입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으나 동년 5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의의와 평가]
세계적인 공황과 더불어 1920년대 후반 민족운동은 점차 침체기 직면하고 있었다.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동맹휴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등 학생운동은 민족의식을 각성시키는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었다. 식민노예교육에 반대하여 동맹휴학운동을 주도한 김병호의 활동은 진주지역 민족운동 활성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는 이후 진주지역 각 학교 연합에 의한 운동으로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