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0477 |
---|---|
한자 | 金琦台 |
영어음역 | Kim Gitae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내동면 독산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형목 |
성격 | 친일파 |
---|---|
출신지 | 경상남도 진주시 |
성별 | 남 |
생년 | 1887년 8월 5일 |
몰년 | 1941년 |
대표경력 | 사립독명학교 교장|경남일보 부사장|경남도평의회 관선이사|보성전문학교 평의원|진주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이사장|중추원 참의 |
[정의]
일제강점기 진주지역의 친일파.
[개설]
1887년 8월 5일 경상남도 진주군 내동면 독산리에서 태어나 대부호인 정부인 김씨의 손자로 입양, 성장하였다. 일제강점기에 380만원에 달하는 자산을 소유한 대지주로서 서울 이부자[李鳳來], 경주 최부자[崔浚]와 더불어 진주 김부자[김기태]로 일컬어지는 남한의 3대 갑부 중 한사람이었다. 진양군 문산면 삼곡리에서 사업을 하다가 지병 악화로 1941년 사망했다.
[학력]
학력에 관한 사항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관리로 진출한 사실에서 사숙·의숙에서 수학한 것을 알 수 있다.
[경력]
1902년 10월 탁지부 세무주사로 서임된 후 1904년 4월 관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진주보통학교와 진주제일보통학교 학무위원, 사립 독명학교 교장, 일어야학회 감독, 『경남일보』 임시사무소장과 부사장, 진주여자양잠전습소 발기인, 진주전기주식회사 이사, 경상농공은행 취체역, 사립 봉양학교 교장, 보성전문학교 기성회위원장과 이사장, 경상합동은행 취체역, 중추원 참의, 경남도청 이전반대 실행위원회 부위원장, 일신교육재단 이사장, 『영남춘추』 고문, 조선특별지원병 진주후원회 고문, 영화흥업주식회사 사장 등 다양한 경력을 지닌 인물이다.
[활동사항]
본격적인 친일행적은 의병의 군자금 요청을 경찰서에 고발한 1909년 4월부터 시작되었다. 1910년에는 일본 관서지방 연합공진회에 관광단으로 참석한 후 감상담을 『경남일보』 연재하였다. 1913년에는 주식회사 경상농공은행 취체역과 일본적십자사 특별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920년에는 진주면협회의 회원과 경상남도평의회 관선의원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경남도장관에 의하여 중추원 의원후보자로 추천되었다. 이외에도 각종 관변단체 자문·고문직을 받아 활동비 명목으로 기부금을 지원하는데 앞장섰다.
중일전쟁 발발에 즈음하여 애국비행기 진주호 헌납을 주도하였으며, 내선일체에 입각한 내선공학(內鮮共學)을 부르짖었다. 또한 애국공채 판매도 독려하는 등 일제의 식민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상훈과 추모]
1911년에는 진주공립보통학교에 교사를 기부한 공로로 은잔 1개를 받았다. 1915년에는 진주헌병대 사천분견대에 부지를 기부한 공로로 일본 상훈국 총재로부터 대정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5년에는 진주면 도로 개수비 1만원을 기부한 공로를 인정받아 감수포장을 받았으며, 『조선시정 15년사』에 ‘조선통치의 공로자 및 선각자’의 한 사람으로 수록되었다.
[의의와 평가]
김기태는 각종 청년단체에 대한 지원은 물론 보성전문학교 기성회장을 역임하는 등 일제강점기 진주지역 문화계몽운동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동시에 자기합리화를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일제와의 적절한 밀월관계나 빈민에 대한 구휼과 각 단체 지원 등 기부행위는 이러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일제로부터 임명된 각종 명예직이나 고문직과 비행기 헌납 수행 등은 이를 반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