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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0233
한자 姜渭秀
영어음역 Kang Wisu
이칭/별칭 鳥川秀一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형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친일파
출신지 경상남도 진주시
성별
생년 1885년연표보기
본관 진주강씨
대표경력 진주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경남일보 부사장과 사장|가차례면장|경남은행 대주주|문산금융조합 조합장|흥아보국단 경남대표

[정의]

일제강점기 진주지역을 대표하는 자산가이자 친일파.

[개설]

본관은 진양. 1885년 출생하여 경상남도 진주군 가차례면 강주동에서 성장하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유년시절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보냈다. 1913년 당시 재산이 40만원에 달할 정도로 대단한 자산가였으며, 일제의 식민정책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협력한 친일인사이다.

[학력]

학력에 관한 사항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관리로 진출한 사실에서 사숙·의숙에서 수학한 것을 알 수 있다.

[경력]

1902년 평안남도관찰부주사로 첫 관직을 역임한 이래 1907년 중추원 의원을 역임하였다. 1909년에는 진주 일어야학회 회장직을 맡았으며, 사립 봉양학교 개교 시 100원을 기부하였다. 또한 『경남일보』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부사장과 사장 등을 지냈다.

1910년 김기태 등과 일본시찰단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이어 진주보통학교 학무위원, 가차례면 면장, 경남은행 대주주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경남은행 이사, 사립 일신고등보통학교 발기인,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기성회 부회장, 문산금융조합 조합장, 예하리 경작공동조합 조합장, 진양곡물통제조합 간사 등 주로 관변단체 임원직을 맡았다.

[활동사항]

본격적인 친일행적은 1910년 『경남일보』 사장 재직 중 일본 시찰을 하면서 이루어졌다. 시찰 후 그는 좌담회·간담회 등을 통하여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널리 홍보하는 데 앞장섰다. 이의 일환으로 김기태 등의 일본 감상문을 『경남일보』를 통하여 주민들에게 소개하였다. 1911년 11월 3일 경남일보사의 천장절 기념식 주최도 이러한 인식의 발로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1933년 자력갱생과 민심작흥을 위한 농촌진흥운동 일환으로 정촌면에 예하리 경작공동조합도 설립하는 등 일제의 수탈정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진주 유지들로 구성된 애국비행기 진주호헌납회에 가입하여 1만원을 기부하였다.

1934년 3월 ‘진주군민의 애국결정체’라는 이른바 ‘애국 제214호 연락기’를 일제에 헌납하였다. 1940년에는 진양군 식량대책위원회 위원과 진양곡물통제조합 간사 등을 맡는 등 일제 민족말살정책에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흥아보국단 참여와 금융조합장 역임도 이러한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

[상훈과 추모]

일제로부터 여러 차례 포상을 받았다.

[의의와 평가]

강위수는 일제강점기 진주지역 문화계몽운동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각종 청년단체에 대한 지원은 물론 사립학교 기성회장을 역임하는 등 외형적인 활동은 화려하다. 이는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동시에 자기합리화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일제와의 적절한 밀월관계나 빈민에 대한 구휼, 각 단체 지원 등 기부행위는 이러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일제로부터 임명된 각종 명예직이나 고문직과 비행기 헌납 수행 등은 이를 반증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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