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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0227
한자 姜相鎬
영어음역 Kang Sangho
이칭/별칭 백촌(栢村)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영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남도 진양군 정촌면
성별
생년 1887년 6월 3일연표보기
몰년 1957년 12월 29일연표보기
본관 진주(晋州)
대표경력 동아일보 초대 지국장

[정의]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진주. 호는 백촌(栢村). 정3품 통정대부의 벼슬을 한 강재순(姜在淳)의 4남 1녀 중 장남이다.

[생애]

1887년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넉넉한 경제적인 여건을 배경으로 신학문을 접한 후 일찍부터 사회운동에 눈을 돌렸다. 1919년 3·1만세운동 때는 진주에서 이강우(李康雨)·김재화(金在華)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결의하고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학력]

1910년 공립진주보통학교(현 진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진주공립농업학교(현 경상국립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일본인이 세운 경남진흥 측량학교에 잠시 몸을 담고 측량법을 배웠다.

[경력]

봉래초등학교 전신인 봉양보통학교를 설립해 신분차별 없이 학생들을 뽑아 가르쳤다. 공립진주보통학교와 진주공립실업학교 초대사친회장을 지냈으며, 동아일보 초대 진주지국장을 역임했다.

[활동사항]

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신현수(申鉉壽)·천석구(千錫九) 등 양반 출신 사회운동가들, 경제력을 가진 백정 이학찬(李學贊) 등과 어울려서 백정의 인권운동을 위해 형평사(衡平社)를 설립했다. 형평사는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에 대한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상호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창립 1년 만에 열린 1924년 2월의 형평사 전조선 임시총회에서 형평사 중앙본부를 진주에 그대로 두자고 주장하는 진주파의 지도자로서 형평운동을 사회주의 노선에 입각한 계급해방운동으로 발전시키려는 서울파와 갈등을 벌였다. 그 후 형평사의 통합에 대한 사회여론의 압력으로 서울형평사진주형평사는 중앙총본부라는 이름으로 재통합하였는데, 그때 강상호는 은퇴를 선언하였다.

[상훈과 추모]

강상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장례는 형평장(衡平葬)이란 이름으로 9일 동안 치러졌다. 정부는 강상호의 3.1운동 공훈을 기려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4.06.05 이칭 변경 벽촌(僻村) → 백촌(栢村)
2024.05.27 내용 수정 출생 연도 1882 → 1887, 3.1운동 참여 및 대통령표창 수여 내역 추가
2013.06.27 [학력] 수정 '중안초등학교'를 '진주초등학교'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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