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08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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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孫貞道 |
영어음역 | Son Jeongdo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주언 |
[정의]
일제강점기 때 진도에 유배되었던 독립운동가.
[개설]
호는 해석(海石). 1882년 평남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에서 아버지 손형준과 어머니 오신도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3세에 연상의 박신일과 결혼했다. 23세에 평양으로 공무원시험을 보러 가던 길에 어느 목사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날 밤 기독교와 서구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화를 받았다. 이튿날 상투를 자른 뒤 집으로 돌아와 조상의 신주를 모신 사당을 부숴버리고 기독교인이 되었고,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활동사항]
1910년 베이징으로 가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를 비롯한 한국인들이 가쓰라 타로[桂太郞] 일본 수상이 러시아로 가기 위해 하얼빈을 지날 때 암살하자는 모의를 했다고 1912년 하얼빈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어 고문 후 한국으로 압송되고 진도에 유배당했다가 1914년 석방되었다.
3·1운동 후에 다시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 해 4월 10일과 11일 이틀간에 걸쳐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최했을 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그 뒤 이동녕을 이어 임시의정원의 의장이 되었다.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과 같이 서울에서 조직된 조선민국임시정부의 평정관(評定官)이 되었으며, 평안도 대표로 37세 때 임시의정원 의원이 된 바도 있다. 1922년 10월 28일 결성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김구(金九)·여운형(呂運亨) 등 16명과 같이 발기하였다. 이보다 앞서 1920년 1월에는 김구·김철(金澈) 등 10여 명과 같이 의용단(義勇團)을 조직,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였다.
흥사단(興士團) 활동에도 참여, 차이석(車利錫)·주요한(朱耀翰) 등과 『흥사단보(興士團報)』를 간행하였다. 1921년에는 대한야소교진정회를 발기, 그 회장이 되었다. 1922년 2월 23일 대한적십자회 총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동삼성 길림(吉林)으로 가서 선교 사업을 전개하다가 1931년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