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08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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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細登-洞祭 |
영어음역 | Sedeung-ri Dongje |
영어의미역 | Sedeung-ri Village Tutelary Festival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세등리 세등마을 |
집필자 | 나경수 |
[정의]
진도군 군내면 세등리 세등마을에서 정월 대보름에 마을을 위해 올리는 제사.
[개설]
본래 진도군 군일면 지역에 속했으며, 가는 등성이라는 뜻으로 세등(細登)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고이면의 유교리 일부를 병합하여 세등리라는 이름으로 군내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주요 성씨는 현풍곽씨로 곽씨 집안이 마을주민 전체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진도의 곽씨는 목사공파와 참봉공파가 있는데 세등마을은 참봉공파 후손들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은 참봉공파 16세손이 1600년 초에 해남에서 건너와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36세손까지 내려왔다.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은 쌀과 배추, 외대파, 고추이다. 마을 공동재산으로 마을회관과 답 900평, 산 약간이 있다.
마을조직은 1반과 2반으로 나뉘어 운영되며 애사시 상부상조하는 상두계와 마을동계가 있다. 마을 내 유물유적으로는 과거 서당을 다시 재건한 청운사와 진도 입도조의 제각이 있다. 주요기관 및 시설로 경로당과 창고가 있다.
[연원]
세등마을은 매년 정월 보름에 마을에서 제사를 모신다. 마을에 질병이나 재앙이 오는 것을 막아달라는 뜻으로 공을 드리는 것이다. 당제 또는 거리제라고도 부르는데, 보름제사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제사는 모두 세 곳에서 모시는데, 이를 각각을 미륵제, 별신제, 짐대제라고 별도로 부른다. 미륵은 마을 입구 도로에서 10여m 산 쪽의 숲 속에 있다.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미륵은 현재 당집 속에 있다. 몇 년 전에 군청에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다며 당집을 지어주었다. 이전에는 주변을 돌담으로 두르고 돌담 위에 나무를 걸친 후 매년 겨울 날을 받아서 마을사람들이 이엉을 엮어 지붕을 이었다.
전해오는 말로는 미륵돌이 본래는 작았으나 점점 커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주 예전부터 미륵돌이 커지면 거기에 맞춰 증수를 했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모습 이전에는 마치 초분과 같아서 마을사람들이 접근을 꺼려했다.
미륵이 서 있는 곳 옆 바위에는 말발자국이 남아 있다. 옛날에 한 장수가 탄 말이 멀리 성채에서 이곳으로 뛰어내려 발자국을 남겼다고 전해지며, 또 삼별초의 난 때 어떤 장수가 말을 타고 가다 이곳에서 죽임을 당하자 이를 애도하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별신제는 마을 앞에서 300여m 떨어진 밭과 논 사이의 공터에서 모신다. 별신제를 모시는 곳과 짐대제를 모시는 곳은 거의 인접지역이다. 별신제는 차일을 치고 그 안에서 모시고, 짐대제는 바로 그 옆에 짐대를 세워두고 모신다.
제사는 음력 정월 14일 밤 11시가 지나면 시작한다. 미륵제, 별신제, 짐대제 순으로 모신다. 제사가 다 끝나면 새벽 2시경이 된다. 제사를 모시기에 앞서 하루 전부터 제관들은 이미 별신제를 모실 곳에 가서 임시 거처를 마련하여 재계를 하고, 제사를 모실 준비를 하면서 기다린다. 또 제사를 모시는 당일에는 초저녁부터 농악을 치는 사람들이 모여서 굿을 치면서 마을을 돌아다닌다. 제사가 모두 끝나면 제관 일행과 굿치는 사람들 일행이 함께 모여 음복을 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 대보름 차례를 모신다.
마을 사람들은 제관들이 제터로 옮겨가면 그때부터는 무척 조심을 한다. 들일을 해서도 안 되고, 또 빨래를 해서도 안 되며, 특히 소매(인분뇨)를 내는 일은 없어야 한다. 또 금줄이 쳐진 곳에는 제사일을 보는 사람 말고는 출입을 일체 하지 않는다.
[제관의 선정 및 역할]
예전에는 정초에 제관을 선정하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지금은 10여 일 전에 제관을 선정한다. 모두 세 명을 뽑는데, 헌관, 축관, 그리고 뒷심부름을 해줄 사람이 그들이다. 생기복덕을 맞추어보고 생기에 맞은 사람 중에서도 집안에 유고가 없는 사람을 고른다.
마을에서 일진을 보는 사람이 먼저 생기를 보아 해당되는 사람들의 나이를 뽑아주면 이장은 이를 마을의 개발위원들하고 상의하여 세 명을 선정하여 부탁을 한다. 요즈음은 제관을 하려고 하지 않아 선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제물 장만은 마을기금으로 한다. 제물을 사는 것은 이장이 관할한다. 이장과 제관들은 13일 날 장을 보러 가는데, 사려는 물건 값이 비싸다 싶으면 다른 곳에 가서 살지언정 값을 깎지 않는다. 제물뿐만 아니라 이틀 동안 제관들이 함께 기거를 하면서 제터에서 식사를 준비하여 해결해야 하므로 그에 필요한 식료품까지 산다.
쌀, 밑반찬, 조미료 등은 마을에서 가져가지만 다른 먹을 것은 제물과 함께 구입한다.
13일에 별신제를 모실 곳에 제청을 마련한다. 예전에 만들던 방식과 요즈음의 방식이 조금 다르다. 예전에는 나무와 짚을 이용해서 제청을 만들었다. 13일 오전에 마을사람들이 협력을 하여 제청을 짓는데, 몇 사람은 산에 올라가 6자에서 7자 정도 되는 곧은 나무를 베어와 껍질을 벗긴다.
또 다른 사람들은 각자 집에서 짚 한 단씩을 가지고 나와 이엉을 엮는다. 집안에 유고가 있는 사람들은 참여를 않는다. 나무로 틀을 만들고 앞쪽을 제외하고 이엉으로 둘러막으며 지붕도 만든다. 그 안에 짚과 덕석을 깔아 별신제를 모실 제청을 마련하고 또 제관들이 제사를 모실 때까지 머문다.
요즘은 쇠파이프를 이용해서 골조를 만들고, 그 위에 보온덮개를 치고 다시 그 위에 차일을 친다. 안에는 짚을 편 후에 그 위에 깐다. 요즈음은 덕석 위에 전기장판을 깔아서 보온을 한다. 마을에서 전기선을 이어 쓰거나 또는 주변 농사용 전기를 주인의 허락을 얻어서 사용한다. 전선을 연결하여 전기불도 밝힌다.
물론 집에서도 목욕재계를 하지만, 13일 제청이 만들어지면 제관들은 제청으로 가서 하룻밤을 보내고 제사를 지내게 되는데, 제청에 가면 13일 다시 찬물로 목욕을 한다. 전에는 지샘(제사를 모실 때만 사용하는 샘)이 옆에 있었지만 경지정리를 하면서 없어졌다.
구입한 소머리는 제청 옆에 가마솥을 걸어서 곱는다. 살은 발라내서 안주감으로 따로 보관하고, 특히 턱뼈는 짐대에 걸기 위해 따로 빼낸다. 14일 낮에 산에서 쪽 곧은 소나무를 베어와 껍질을 벗긴다. 위쪽에는 생솔을 그대로 남긴다.
껍질을 벗겨 만든 짐대의 위쪽 생솔가지 아래쪽에 소의 턱뼈, 명태 한 마리, 그리고 한지를 접어서 왼새끼로 묶는다. 이렇게 만든 짐대를 제터 주변의 목고실나무에 묶어 세운다. 묶어둔 것들은 저절로 떨어질 때까지 그대로 둔다. 그래서 현재 짐대가 있는 주변에는 예전에 걸었던 소턱 뼈가 아직도 여러 개 널려 있다.
제청이 만들어지고 나면 주변에 금줄을 쳐서 다른 사람의 출입을 일체 금한다. 설혹 술을 마시러 가거나 화투놀이를 하려는 경우도 없진 않았지만, 마을의 어르신들이 철저히 금한 이후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다.
14일에는 미륵당을 청소한다. 창호지를 가지고 가서 매년 새로 창을 바른다. 창 바르기가 끝나면 안에 촛불을 밝혀놓고 돌아온다.
제수는 별신제를 모실 제청이 있는 곳에서 직접 만든다. 소머리는 고고, 메를 짓고 탕을 끓이는 정도이다. 제관들은 13일부터 그곳에서 직접 식사를 지어 해결한다.
축관을 할 사람은 그 사이에 축문을 새로 쓴다. 마을회관에는 동제 축문이 기록된 문서가 보관되어 있다. 1990년도에 만든 것과 2003년도에 만든 2종이 보관되어 있다.
1990년 본은 ‘순서(順序)’, ‘미륵제축(彌勒祭祝)’, ‘별신제축(別神祭祝)’, 새로 한글로 지은 ‘미륵산신제축’과 역시 한글로 지은 ‘짐대제축’이 순서대로 적혀 있으며, 별장에 한문으로 된 미륵제축과 별신제축을 한글로 그대로 옮겨적은 것이 한 장 끼워져 있다.
또 2003년 본은 ‘순서(順序)’, 한글로 지은 ‘미륵산신제축’, 한문 축문을 한글로 옮겨 적은 ‘미륵불제축’, 한문으로 된 ‘미륵불제축(彌勒佛祭祝)’, 한문 축문을 한글로 옮겨적은 ‘별신제축’, 한문으로 적은 ‘별신제축(別神祭祝)’, 한글로 된 ‘짐대제축’의 순서로 묶어져 있다.
[절차]
14일 밤 10시경이 되면 마을에 굿을 치는 사람들이 마을회관에 모인다. 회관에는 굿물이 보관되어 있다. 농악을 치면서 이들은 마을을 돈다. 예전에는 마을 세 곳에 우물이 있어서 샘굿을 치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지금은 상수도를 사용하기 때문에 필요한 개인이 모터를 연결하여 끌어올린 물을 사용하는 집이 있다.
시간이 지나 10시 30분이 되면 메를 짓고 탕을 끓인다. 또 그 사이에 걸렁이 네 개를 만든다. 이것은 산신제를 모시면서 바칠 것이다.
11시가 되면 헌관과 축관은 이미 마련해 둔 주전자에 담은 정화수와 잔대를 들고 미륵당으로 향한다. 정화수는 14일 오전에 떠둔다. 미륵당에 들어가는 입구에 마을에서 ‘문텅바위’라고 부르는 바윗돌이 있는데, 그 앞에 가져간 걸렁이 네 개를 놓고 절을 올린다. 이것이 산신제이다. 절을 마치면 걸렁이 네 개를 사방에 하나씩 던진다.
미륵당에 들어가서는 정화수를 부어놓고 절을 올린다. 미륵당에는 일체의 제물은 없으며, 오후에 켜놓은 촛불만 밝다. 독축을 하고 나서 조용히 나와 문을 닫고 제청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촛불은 끄지 않고 다 타도록 내버려둔다. 화재를 막기 위해 기왓장 위에 촛불을 밝힌다.
제청 안에서 별신제를 모신다. 제관과 헌관이 미륵제를 모시러 간 사이에 심부를 을 맡은 사람이 별신제상을 진설해 둔다. 차일 안쪽에 제상을 차려놓고 헌관은 절을 하고, 축관은 독축을 한다. 별신제를 마치면 바로 짐대에 제사를 모신다.
짐대제를 모실 때는 굿을 치던 사람들도 함께 참여를 한다. 마을에서 불을 피워놓고 놀고 있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여 짐대제를 모시니 함께 참례하라고 연락을 한다. 짐대 앞에 상을 차릴 경우도 있고, 한지를 깔아 상을 대신할 때도 있다. 짐대 앞에서 재배를 하고 나면 구축(口祝)을 한다. 예전부터 짐대제에는 축문을 따로 쓰지 않고 축관이 말로 비는 정도였다. 지금은 한글로 구축을 위한 문안을 만들어두었다.
짐대제가 끝나면 사람들은 철상을 하여 마을회관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면서는 쇳소리 등을 전혀 낼 수 없으며 서로 말도 하지 않는다. 남은 음식은 회관에 보관해 두었다가 다음날 마을사람들이 모여 함께 나누어 먹는다. 사람들은 각자 집에 돌아가 각 가정에서 차례를 모신다. 제청을 그대로 두었다가 3~4일 후에 철거를 한다.
한때 세등마을에서는 3년 정도 동제를 모시지 않은 적이 있었다. 1970년대쯤 당시 면장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동제를 모시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한 해에 주로 젊은 사람들만 일곱 명인가 아홉 명이 죽었다.
마을에서는 동제를 모시지 않아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며 다시 모시기로 결의를 하여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모셔오고 있다. 그래서인지 동제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이제는 없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동제가 크게 간소화되지 않은 채 전승되고 있다.
특히 이 마을에는 미륵과 관련된 영험담이 전해진다. 어린 학생들이 미륵당 주변에서 오줌을 쌌다가 크게 아팠다거나 심지어 다음날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미륵 주변에서는 극히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고, 침도 뱉지 못하게 한다.
개인적으로 공을 들여서 아들을 낳은 집도 있다. 마을에서 세 집이 미륵에 공을 들여 아들을 보았으며, 미륵이 점지해서 태어난 아이들이 현재는 환갑이 넘었다고 한다.
[제물/용품/제구]
세등마을에서는 소머리를 제사에 사용하고, 돼지고기는 쓰지 않는다. 또한 산신제를 모시면서 놓는 것으로 걸렁이가 있다. 걸렁이란 음식물을 담을 수 있도록 짚을 이용해서 만든 것이다. 짚 한쪽을 묶어 반대쪽으로 넘겨 묶은 후에 속에 밥, 미역, 소뼈 등을 넣고 다시 여며 묶는다.
별신제 제상은 간단하다. 메와 탕, 그리고 과일과 명태 등 마른 반찬을 놓는다.
[부대행사]
4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보름날 마을사람들이 모여 놀았다. 주로 윷놀이를 하면서 술잔을 나누었다. 소머리를 삶아 준비한 고기로 안주를 하면서 마을회관에 모여 놀았던 것이다.
또 예전에는 걸궁이라 하여 대보름 때부터 각 가정을 돌면서 농악을 쳐주고 거기서 얻은 쌀과 돈을 모아 마을자금에 보탰지만, 요즈음은 이런 행사가 없어졌다.
마을총회는 연말에 열리며, 여러 가지 마을의 일을 논의하고 또 일 년간의 일을 보고한다. 이때 동제와 관련된 결산보고도 겸하게 된다.
[금기]
일단 제관을 하기로 한 사람은 통보를 받은 날부터 몸조심을 한다. 궂은 곳에 출입을 삼가고 또 길거리에서라도 유고가 있는 사람을 만날지 모르기 때문에 집 안에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
제관을 뽑을 때 상을 당했다거나 아이를 출산한 집안의 사람은 제외된다. 또 정월 들어 초상집에 다녀온 사람도 제외되며, 개고기나 노루고기를 먹은 사람도 안 된다. 또 여자는 안 된다.
[현황]
새마을사업이 한창이던 1970년대, 당시 이 마을 출신의 면장이 강력하게 주장하여 동제를 모시지 않았다가 마을에서 젊은 사람들이 한 해에 여러 사람 죽게 되자 다시 동제를 모시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동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예전처럼 엄숙한 분위기는 덜하며, 특히 제관을 서로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제관 선정에 어려움이 따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