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5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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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淨齋李錫庸簡札-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이선아 |
소장처 | 정상렴 가옥 -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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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고문서 |
관련 인물 | 이석용 등 |
용도 | 서신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에 살고 있는 정상렴이 소장한 정재 이석용 간찰.
[개설]
정재 이석용이 투옥 중에 진안 백운면 평장리에 살고 있는 수당(修堂) 정종엽(鄭鐘燁)에게 보낸 옥중 편지이다.
[제작 발급 경위]
이석용이 1913년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 있으면서 동료이자 후원자인 수당 정종엽에게 보낸 것이다.
[형태]
「정재 이석용 간찰」은 한지에 작은 글씨로 적은 편지이다. 가로 30㎝, 세로 20㎝ 정도의 크기이다.
[구성/내용]
이석용[1878~1914]은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1913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4년에 순국하였는데, 이 편지는 바로 이석용이 대구 형무소에 복역하는 사이에 쓴 것이다.
‘대장부(大丈夫) 평생사(平生事) 무불가대인언(無不可對人言)’으로 시작하는 그의 편지의 첫 구절은 바로 사마광(司馬光)이 한 말로 ‘내가 평생 동안 한 일 가운데서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없다’라는 뜻으로 항일 의병에 투신한 소회를 적고 있다. 편지 끝에는 전주와 대구 등지에 수감되어 있을 때, 혹은 의병 활동을 하던 중에 지은 시(詩) 7편을 후록하고 있다.
이석용은 한말 의병장으로서 본관은 전주, 초명은 갑술(甲戌), 자는 경항(敬恒), 호는 정재(靜齋)이다. 1907년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908년 호남 창의 대장 기삼연이 전라남도 순창의 복흥산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순국하자 대장으로 추대되어 남원과 전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접전하였다. 1912년 호남 지역 지사들과 임자동 밀맹단(壬子冬密盟團)을 조직하였다.
편지를 받는 정숙명(鄭淑明)은 수당(修堂) 정종엽(鄭鐘燁)[1885~1940]이다. 정종엽은 일제 강점기 유학자로 자는 택신(宅新)이고, 호는 수당이다. 정진용(鄭晉鏞)·정진희(鄭鎭喜)로 이름을 바꿔 활동하기도 하였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진안군 마령면 계남리(溪南里) 출신이다. 한말 유학자 간재(艮齋) 전우(田愚)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등과 교유하였고, 습재(習齋) 최제학(崔濟學), 정재(靜齋) 이석용(李錫庸)과는 도의로 친교를 맺어 교유하였다. 정종엽은 1912년 이석용이 의병 활동의 재개를 위해 각 지역에 비밀 결사인 임자동 밀맹단(壬子冬密盟團)을 조직하자, 진안 지역 단원으로 참가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활동하기 위해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1912년 10월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진안군 마령면의 내산사(萊山祠)에 배향되었으며, 문집으로 『수당유고(修堂遺稿)』가 있다. 2003년에 건국 포장을 받았다.
[의의와 평가]
진안 지역의 대표적 항일 의병장으로 호남 창의 의병 대장이었던 정재 이석용의 옥중 서신으로서 오랫동안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2003년 건국 훈장에 추서되었던 수당 정종엽의 집안에서 발견된 것이어서 더욱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