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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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華東學校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동상주천로 2225[주양리 466]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용엽 |
[정의]
1908년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에 설립된 사립 교육 기관.
[개설]
병자호란으로 임금이 삼전도에서 항복하자 김중정(金重鼎)은 한양을 떠나 주천면 주양리 주자천 유역에 와룡암(臥龍庵)을 건립하여 후진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와룡암은 전라북도 동부 지역 최초의 학당으로 300여 명의 제자들이 배출되어 기호학파의 맥을 이었다. 김중정의 9대손인 김태현(金泰鉉)은 와룡암의 전통을 이어 1908년 사립 화동 학교(華東 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을 역임하면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설립 목적]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07년에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여러 인사들이 진안 지역으로 모였다. 김우식(金宇植)·김영철(金永哲)·박문혁(朴文赫)·육상필(陸相弼) 등은 양봉래(梁鳳萊)의 사랑방에서 이 지역의 유학자인 김태현·이병항(李秉恒) 등과 만나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신학문을 배우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로 결의하고 민족 교육을 목표로 하는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변천]
화동 학교는 1908년에 개교하였으나 혼란한 정국에 가짜 의병들이 출몰하여 마을에 들어와 약탈과 행패를 부리자 1909년 무렵에는 육상필·김우식·김영철·박문혁 등이 모두 떠나고 학교 재정도 고갈되어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1910년에 학교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지역 인사들로 추진 위원을 구성하고, 주천 향약 재단을 인수하여 향약 부속 학교로 군수와 학부 대신에게 인가 신청을 올려 ‘사립 진안 화동 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인가 이후 화동 학교는 지금의 주천 초등학교 부지에 본관 1동 6칸과 숙사 3칸을 건축하였고 교구를 구입하였으며 논 4만 ㎡의 기금도 확보하였다. 그러나 화동 학교의 학생들이 3·1 운동을 주도하자 일제는 화동 학교를 즉시 폐교시키고 공립 주천 보통학교로 바꾸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화동 학교의 교사진은 김영로(金永輅)와 이병항(李秉恒) 및 대한제국 군대 출신인 육상필(陸相弼)로 구성되었다. 진안 지역만이 아니라 인접한 용담 지역에서도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진안 지역에서는 화동 학교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2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만세 운동을 벌였다.
[의의와 평가]
화동 학교는 배일 사상과 민족 교육에 힘쓰면서 주천 향약 재단 인수 후에는 향약 부속 학교로 발전하였다. 3·1 운동 이후 일제에 의해 강제로 공립 학교로 전환되었으나 그 정신은 이어져 진안 지역에서는 이후에도 많은 애국지사들이 배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