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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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熊峙戰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옛웅치길 42[세동리 981]|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하태규 |
[정의]
1592년 진안에서 전주로 넘어가는 웅치 일대에서 벌어진 조선 관군·의병과 왜군의 전투.
[개설]
임진왜란 개전 20일 만에 조선의 수도 한양이 함락되고, 2개월이 지나자 전라도를 제외한 조선의 거의 전 지역이 왜군에게 점령당하였다. 한양을 점령한 왜군의 일부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千隆景]의 지휘 아래 호남을 공격하여 1592년 6월 23일에 금산성을 점령했고, 이를 거점으로 용담·진안을 거쳐 전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진안을 점령한 왜군은 1592년 7월 8일 본격적으로 웅치(熊峙)를 공격하였으나, 전라도 관군과 의병의 격렬한 저항으로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웅치를 넘은 왜군은 안덕원(安德院)까지 진출하였으나, 동복 현감 황진(黃進)이 이를 격퇴하고 전주 부성과 전라도 방어에 성공했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초기에 왜군은 곧바로 조선의 수도 한양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전라도는 왜군의 공격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1592년 5월 말부터 왜군은 전라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전라도는 감사(監司) 이광(李珖)이 두 차례에 걸쳐 동원한 대규모 근왕병이 용인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력과 사기가 크게 저하된 상태였고, 병사(兵使) 최원(崔遠)이 관군 2만 명을 거느리고 다시 북상하여 호남을 방어할 수 있는 병력이 현저히 부족하였다. 다행히 고경명(高敬命)과 김천일(金千鎰) 등 이 지역의 선비들이 창의 활동을 전개하여 의병을 일으켜 전력 일부를 회복할 수 있었다.
전라도는 금산·육십령·부항 등 외곽 지역에 관군을 배치하여 방어하고자 하였으나, 왜군은 1592년 6월 23일에 금산을 점령했고 이곳을 거점으로 전라도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6월 말에는 용담과 진안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 전라도 지역은 왜군의 공세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전라 감사 이광은 광주 목사 권율(權慄)을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삼아 남원에 배치하고, 웅치(熊峙)와 이치(梨峙)에 김제 군수 정담(鄭湛)·나주 판관 이복남(李福男)·동복 현감 황진이 지휘하는 관군을 배치하여 방어하도록 하였다. 고부의 김제민·진안의 김정과 김수 등 이 지역의 많은 선비들도 의병을 거느리고 웅치 수비에 함께 임하였다.
[경과]
1592년 7월 2일에 진안에 주둔하던 왜군이 장수로 이동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전라 감사 이광은 웅치 수비에 임하던 동복 현감 황진을 남원으로 이동시키고 대신 의병장 황박(黃樸)으로 하여금 웅치 수비를 돕게 하였다. 그러나 왜군은 7월 5일부터 다시 웅치로 향하여 7월 8일 새벽부터 웅치 방면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권율은 전라 감사 이광의 지시에 따라 남원에서 영호(嶺湖)의 경계를 지키고 있었고, 황진은 남원에서 돌아오는 중이었으므로 웅치에서는 김제 군수 정담·나주 판관 이복남·의병장 황박 등이 왜군과 싸우게 되었다. 전장에서는 의병장 황박이 최전방을, 나주 판관 이복남이 제2선을, 김제 군수 정담이 정상에서 최후 방어를 담당하였다.
새벽부터 시작된 왜군 선봉의 공격을 이복남 등이 결사적으로 싸워 물리쳤고, 해가 중천에 떠오른 시점에 왜군이 다시 전면적으로 공격하자 웅치의 수비 병력도 이에 맞서 치열한 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저녁 무렵 조선군의 화살이 떨어지고 피로한 틈에 왜군이 다시 전면 공격을 가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복남과 황박은 안덕원으로 후퇴했다. 김제 군수 정담과 휘하의 병력은 웅치에 남아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정담을 비롯하여 종사관 이봉·강운 등 대부분의 병력이 전사하고 웅치는 왜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들의 용맹에 감동한 왜군은 전사한 아군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큰 무덤을 만들고 “조선국의 충성스런 넋을 위로한다.[弔朝鮮國忠肝義膽]”라고 적은 푯말을 세우고 지나갔다고 한다. 웅치를 넘은 왜군은 1592년 7월 9일에 전주 부근까지 진출하였으나, 남원에서 돌아온 동복 현감 황진이 안덕원 인근에서 전력이 약화된 왜군을 격파했다.
[결과]
안덕원에서 동복 현감 황진에게 패하고 퇴각한 왜군은 며칠 동안 진안 지역에 머물면서 약탈을 행하다가 금산으로 철수하였다. 이들은 잔존 병력들과 함께 다시 진산을 거쳐 이치를 공격하였으나, 동복 현감 황진과 광주 목사 권율 등에게 패배하여 금산성으로 철수하였다.
[의의와 평가]
웅치에서 안덕원까지 이어진 일련의 전투는 후일에 벌어진 이치 전투와 함께 임진왜란 초기 호남 방어에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었다. 웅치 전투를 통해 조선의 관군과 의병은 시간적 여유를 갖고 전열을 가다듬어 왜군의 호남 점령 시도를 무산시켰다. 호남 지역의 곡창을 보존함으로써 조선은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는 인적·물적 기반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