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4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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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國時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최범호 |
[정의]
고구려·백제·신라가 정립했던 시대의 전라북도 진안 지역의 역사.
[개설]
진안 지역에 대한 기록을 전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삼국사기』인데, 이 역시 시기는 백제 말 이후부터로 한정되며, 또한 내용면에서도 매우 단편적 사실만을 기록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지금의 진안군은 당시 백제의 영토로서 난진아현(難珍阿縣) 또는 난지가현(難知可縣)으로 불렸다. 백제가 멸망하면서 진안 지역도 신라에 편입되었는데 757년(경덕왕 16) 전국 고을의 이름을 고치면서 진안 지역에 있던 물거현은 청거현(淸渠縣)으로 개칭되어 진례군(進禮郡)의 영현이 되었고, 난진아현은 진안현으로 개칭되어 벽계군(壁溪郡)의 영현이 되었다.
난진아현은 난지가현·난등량현(難等良縣)·월량현(月良縣) 등으로 불렸고, 『삼국사절요』에서는 난지가군(難知可郡)으로 기록되었다. 고대에 진(珍)은 ‘돌’로 읽혔으므로 ‘난진아·난지가’는 ‘난돌아·난드르’로 읽히고, 월량은 ‘달아·다라’로서 ‘돌아·드르’를 다르게 쓴 것이다. 결국 ‘진아’와 ‘월량’은 같은 말이며, 진안(鎭安)은 이를 미화시킨 표현이다.
이처럼 진안 관련 기록은 행정 구역 개편 내용 외에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삼국 시대 진안 지역을 무대로 전개되었던 역사적 상황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지역에 전하는 설화 등을 통하여 진안 지역도 백제와 신라의 각축장이었다는 점은 확인된다. 즉 상전면 주평리에 있는 회사동 삼층 석탑의 건립과 관련된 설화인데, 주민들이 전란으로 살 수 없어 한 신동(神童)으로 하여금 백일기도를 드리게 하자, 산신령이 나타나 이곳에 절을 짓고 탑을 세우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이러한 설화는 백제와 신라의 국경 지대였던 이 지역이 빈번한 전란에 시달렸던 사실을 말해 준다.
[진안 지역의 삼국 시대 유적]
진안 지역은 교통의 요지라는 특성으로 인하여 삼국 시대의 백제나 가야 문화의 영향을 보여주는 고고학 자료가 풍부하다. 특히 용담면 월계리에 위치한 성남리 산성·와정 토성·황산 고분 떼는 백제와 대가야의 접경 지역에 위치하면서 두 지역의 문화를 잘 보여준다. 월계리 황산 고분 떼에서는 가야의 돌널무덤이 대규모로 발견되었고, 와정에서 확인된 토성은 목책을 두른 것으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