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T01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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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 |
집필자 | 문순덕 |
1950년대 연애풍경
1950년대 제주시의 젊은이들이 데이트를 할 수 있는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고 한다. 즉 제주시에서 돌아다닐 만한 곳이 많지 않아서 칠성통(제주중앙우체국 동북쪽에서 동문로터리 서북쪽 일대 상가를 가리킴)에 있는 음식점(그 당시 유명한 음식점은 동해식당;송대장 손자가 경영했음)에 가서 음식을 먹거나 빵집을 이용하기도 하고 탑동(지금은 매립되어서 바닷가를 거닐 수 없음)이 제주시민들의 바닷가여서 여기를 거니는 정도였다고 한다.
김홍식은 1955년에 맞선을 보고 한 8개월쯤 만나다가 입대를 하니까 1957년 결혼할 때까지를 연애기간이라 할 수 있다. 1950년대에 제주시에 극장이 있었지만 건물이 낡아서 데이트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고 한다. 1950년대는 전쟁을 치러서 제주시 칠성통에 제주극장과 중앙극장이 있었지만 시설은 좋지 않았다. 그때는 TV도 없고 오락시설도 없어서 젊은이들이 젊음을 해소할 수 있는 문화향유 공간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나마 극장에서 영화나 쇼 관람을 할 수 있는 것도 커다란 문화생활이라 할 수 있었다. 광주서중 시절에도 교칙이 엄해서 학생들이 극장에 드나들면 퇴학감이어서 극장 앞을 함부로 지나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6·25전쟁 이후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도 그렇지만은 한가하게 연애하고 사귀고 할 그런 사회 분위기가 못 됐어. 그것 참 사람이 먹지 못하고 굶주려서 피난 가고, 집집마다 피난민이 와 얹혀 살게 되고, 어려움 속에서 그렇게 한가하게 낭만적인 연애하고 뭐하고 할 분위기가 못 됐다고 해야지. 그 몇 년 간은 그렇지. 연애라고 하는 풍조, 우리 때만 하더라도 거의 없었던 같고. 물론 간혹 있긴 하지마는 극히 드물었고. 우선 지금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우리가 자랄 때는 ‘남녀관계’는 요즘 사람들이 이해 못해요. 한 예로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극장이라 하면 무조건 정학처분이고 질 나쁘면 퇴학시켰거든. 또 연애를 했다 하면 정학당하고, 여학생하고 얘기만 해도 의심받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감정을 억제해서 살아왔지. 개인적인 감정을 억누르면서 살아오다가 해방이 됐어요. 우리는 신식 때라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어요. 우리 아버지랑 장인은 제주농업학교 1년 선후배이고 서로 잘 아니까 어른들끼리 결정했어요."
중매반 연애반
중매는 집안 어른들이 알아서 진행했다. 제주시에서는 사둔(사돈)을 맺고 싶으면 신랑댁에서 신부댁을 잘 아는 사람이 중매쟁이가 되어서 의사타진을 한다. 보통 남자쪽에서 여자쪽에 세 번은 가야 성사된다고 했다. 두 번 가면 이 핑계 저 핑계 하면서 ‘생각해 봅시다’ 하든지, 아니면 우리딸은 아직 결혼할 때가 아니라 하면서 피를 말렸다. 그렇게 해서 세 번 가도 안 되면 혼사가 성립하지 않고, 맘에 들면 세 번째는 거의 성사되는 것이라 한다.
김금심과 김홍식은 집안끼리 잘 아는 사이여서 친척의 중매로 만나기는 했지만 자연스럽게 연애 경험도 했다. 그 당시도 중매혼과 연애혼이 절충되던 시절이다. 1950년만 해도 제주시가 지금처럼 크지 않아서 일도동, 이도동, 삼도동, 건입동, 용담동 하면 어느집 자손인지 대강 파악이 되었다. 그리고 통혼권도 멀지 않았다. 중매쟁이는 남자친척(양쪽 집안과 관계 있는 사람이었음)이었다. 중매가 들어오면 여자 아버지 중심으로 진행되었지만 당사자의 의견도 존중해 주었다. 부모가 당사자끼리 한번 만나보라며 ‘맞선’을 주선했다. 김금심은 삼도동에 살고 김홍식은 칠성통에 살아서 서로 누구인지 대강 짐작하고 있는 상태였다. 김홍식 아버지(김영린)가 공직을 그만두고 사업을 할 때니까 은행에 자주 드나들어서 며느리감을 근거리에서 관찰했다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금융기관은 흥업은행과 제주은행, 농협 정도였다. 양가 아버지는 제주농업학교 1~2년 차이고, 지방 유지고, 시아버지는 도의원이고 친정아버지는 변호사여서 사회활동도 같이 하면서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군 복무 중 결혼식
김홍식은 1955년(27세)에 약혼식을 하고 결혼을 하려고 했는데 영장이 나와서 다시 결혼날짜를 받으니까 1957년(29세) 3월에 결혼하고, 그 해 가을에 제대했다고 한다. 본인의 결혼식이어서 한 20일 휴가를 받았다. 그 당시 신혼여행이란 단어는 아주 생소했다고 한다.
김홍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한 것이 1950년이니까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없어서 6·25전쟁이 일어나니까 혼란 속에 고초를 겪다가 목숨을 건지고 사태가 수습되자 학교에 다녔다. 졸업을 할 무렵에 전쟁이 종전의 기미가 있었고, 그 당시는 대학생은 졸업할 때까지 군입대가 연기되었다. 대학 4학년 때 입대하게 됐는데 장교로 입대해야 된다고 해서 그해 여름방학에 광주 법영학교에서 간부 후보생 장교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졸업을 했는데 어쩌다 보니 장교로 갈 기회가 없어서 나중에 사병으로 입대하게 되었고, 2년 정도 현역으로 근무했다. 군복무 중에 중부 전선, 서부 전선 등 홍천, 연천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김홍식은 초등학교 졸업 후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객지생활을 했다. 제주도에 들어와서 일도동에 터전을 마련했다. 결혼 후에는 삼도이동에 살았으며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지어서 오기 전에는 북동쪽으로 200m 내려간 곳에서 신혼생활을 했다고 한다.
귤림회관 예식장
일제강점기에는 제주시에 예식장이 없었고 김홍식이 1957년에 결혼할 때는 귤림회관이라는 사무실을 예식장으로 꾸며서 사용했다. 예식장 내부를 보면 바닥에는 신랑신부가 걸어갈 수 있도록 양쪽에 촛불을 가지런히 세우고 천정에 오색깃발을 매달았다. 남녀어린이가 화동이며 결혼식이 끝나면 신랑 목에 화환을 걸어주었다. 천정에는 바구니에 흰색 장닭을 담아두었다가 예식이 끝나면 흰색끈을 잡아 다녀서 장닭이 밖으로 날아간다. 결혼식날 신랑은 양복 입고, 신부는 한복을 입었다. 신랑이 묵은성 신부집에 도착하면 상객이 예장을 담은 홍세함을 들고 마당 안으로 들어간다. 신부집에서는 문전상에 돼지머리를 올리고 홍세함을 받는다. 홍세함에는 예장과 광목 한 필을 놓았다. 신부집 어른이 홍세함에서 예장을 꺼내서 잘잘못을 검토한다. 신부집에서 예장을 검토하는 동안 신랑은 상객들과 같이 신부집 마당에서 대기한다. 김홍식은 신부집에서 1~2시간을 기다렸다고 한다. 예장이 합격되면 신랑방으로 들어간다. 신부 부모, 친척과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한 다음 예식장 시간에 맞추어서 신부를 데리고 집을 나선다. 신부집 밖에는 치프자가 기다리고 있다. 김홍식이 결혼할 당시에 승용차는 거의 없던 시절이라 관용 지프차를 빌려서 사용했다고 한다. 요즘처럼 지프차 앞면에 꽃으로 장식해서 신랑신부가 타는 차임을 알 수 있다. 이 결혼 풍경은 여러 사진에서 자세히 알 수 있다.
자녀들의 혼인
김금심과 김홍식의 자녀들은 주로 1990년 초까지 결혼을 했다. 두 아들은 미국 생활을 하게 되어서 신혼살림 준비가 필요 없었다. 어머니들이 하던 대로 딸이 있으니까 좋은 솜이나 이불감이 보이면 미리 준비해두었다. 안덕면에서 재배한 면화솜과 양단에 홍꿩과 학 100마리 수놓은 천이 유행할 때 구입해 두었지만 실제로 잘 활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홍식은 삼남매가 다 서울 사돈이어서 서울에서 예식을 치른 후에 제주시에 와서는 식당에서 피로연을 했다.
환갑잔치
환갑잔치는 오래 전부터 했다. 김홍식 조부[김달추(金達秋)]도 1927년에 환갑잔치했던 사진이 남아있다. 서울에 살던 친척이 제주도에 와서 사진을 찍어주었다고 한다. 성안에서 아라동으로 사진사를 청해서 찍을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집이라 생각한다. 부모 환갑잔치는 1970년대 초에 했다. 그 때는 환갑잔치를 하는 분위기였다. 친척들을 모시고 환갑상 받고 사진 찍는 정도이고, 음식을 만들어 먹는 정도였다. 김홍식 아내(김금심)는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주변에서 보면 남편이 먼저 돌아가시면 어머니는 환갑잔치를 하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장례식장의 변화
김홍식은 상장례문화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을 말해 주었다. 김홍식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는 주로 5일장을 했는데 요즘은 3일장을 하는 것 같다고 한다. 제주시에서는 부모가 아파서 병원에 치료를 받다가 아주 가망이 없다고 하면 집으로 모셔왔다. 그것이 사람의 도리고, 효도라기보다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생각하는 것이 ‘내가 이 집에서 살다가 죽으면 무덤으로 간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병원에서 장례를 치른다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것이며 2000년대 들어와서 보편화되었다고 보았다. 과거에는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집안에 들이지 못하는 풍습이 있어서 숨이 끊어지기 전에 집에 모시려고 했다. 객사해서 집 밖에서 돌아가시면 노지에 빈소를 차리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집에서 초상준비를 일체 안 하니까 상관없다고 한다. 김홍식은 부모상 때 집에서 치렀다고 한다.
"내가 이 집을 힘들게 마련했으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근데 3~4년 전부터 생각이 달라지고 있어요. 이제는 세상이 많이 변했지. 그래서 나도 장례식장에서 장례식을 치러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지."
또 한 가지는 화장문화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화장을 생각하지 못했는데 근간에는 화장에 대한 거부감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삼우제와 삼년상
장사를 지낸 후에 지내는 제사 중에 ‘삼우제’가 있다. ‘초우제, 재우제, 삼우제’해서 세 번 제사를 지냈다. 초우제는 장지에서 본굴 쌓고 바로 이어서 지낸 후에 집에 와서 그 상을 놓고 다음날에 재우제를 지낸다. 그런데 이런 것이 번거로우니까 장지에서 초우제하고, 다음날은 재우제 겸 삼우제를 지냈다. 이제는 이것도 번거로우니까 장지에서 장사 지내고 초우제, 재우제, 삼우제를 한꺼번에 지낸다.
김홍식이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가 1976년이니까 그 당시는 삼년상을 하던 시기였다. 장례식을 마치고 저녁에 친척 어른들이 상주(김홍식)에게 의례 절차를 어떻게 할 것인가 질문했다. 형제들이 흩어져 살고 소상으로 간소화하라는 정부시책(가정의례준칙 준수 요청)이 있어서 축으로 고하고 소기만 하기로 정했다. 나중에 들으니까 문중에서 대학교수인 아들이 어떻게 부모 소기만 할 수 있느냐며 나무랐다고 한다.
조부에 대한 예의
김홍식이 2살 때 조부가 돌아가셨는데 백부는 전라남도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당 부친이 돌아가시니까 효를 행하기 위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제주도로 내려왔다. 백부는 제주시 아라동에 살고 조부 묘지는 관음사 위에 있었다. 한 1년간은 백부가 아침저녁으로 산천단까지 걸어가서 문안인사를 했다고 한다. 묘실을 지어서 살 수 없으니까 묘지 근처에 가서 삼년상에 대한 예를 갖춘 것이다. 김홍식은 어린 시절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제주도는 산소 주변을 돌담으로 쌓아서 이를 ‘산담’이라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산담을 주인 모르게 가져가서 일본군인 막사를 지었다고 한다.
제사의례
김홍식은 부친 사망 후에 장남이니까 제사를 했다고 한다. 1년에 명절 두 번(설, 추석), 제사 두 번(부친 기일은 2월 15일(양)이고, 모친 기일은 12월 16일(양)임. 김홍식은 제사와 생일이 양력이라 함)이다. 합제는 많이 하는 데 김홍식이 자식한테 제사를 물릴 때는 조부모 제사는 합제할 수 있다고 한다. 친척들한테 물어보면 다 합제하는 분위기라 한다. 이런 것으로 보면 제사의례에도 큰 변화가 생긴 것이다. 제사 물려주기는 부모 형편에 따라서 다르기는 해도 부모가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 제사를 하다가 물려줄 생각이라 한다. 김홍식 아내(김금심)는 집에서 본인이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명절이나 제사는 가족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다. 형제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기회인데 앞으로는 점점 그런 관계가 소홀해 질 수 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