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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2동의 세시풍속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1004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
집필자 문순덕

세시풍속

김홍식은 제주도에는 설이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한다. 설이라는 말 대신 멩질(명절)이라고 하는데, 과거에 행정당국에서 양력설을 강요하면서 양력설을 많이 지내고 음력설을 의도적으로 하지 못하게 했다. 다른 지방에서는 오히려 설이란 음력 정월초하루로 인식하고 양력으로 1월 1일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김금심은 설음식을 특별히 준비했다. 남편(김홍식)이 대학교수여서 세배꾼(주로 제자들)이 오니까 떡국 등 명절음식을 많이 준비했다가 대접했다. 손님들이 방문하면 조그마한 음식이라도 대접해 주고 싶어서 마련했다. 세배하러 다닐 때는 식사시간을 놓칠 수 있으니까 김금심은 자신의 집에 온 손님들의 허기를 달랠 정도 음식을 준비했다. 또한 손님들이 찾아오는 것이 고맙고 즐거워서 일을 하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1월~3월의 세시풍속

정월대보름 명절은 제주도에 없는 풍속인데 1990년대에 대중매체의 영향으로 다른 지방의 풍속을 따르고 있다. 오곡밥과 채소, 부럼 까먹기 등 지금은 전국적인 축제가 되고 있다.

김홍식이 어린 시절(일제강점기)에 들은 말이다. 지금은 정월 초하루부터 새해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농경시대에는 입춘이 되어야 새해라고 믿었다. 그래서 입춘날 젊은 총각이 방문하면 집 주인이 아주 반겨서 곤밥(쌀밥)에 고기국을 대접하고, 여자는 남의 집에 방문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입춘 때는 절에서 부적을 그려 주었다. 샛절드는 시간에 붙이라고 하는데 안방용과 조왕용 부적이 다르다.

2월은 영등달이어서 초하루부터 보름까지는 빨래도 삶지 못하고, 옷에 풀도 먹이지 못하고, 장도 담그면 안 되었다. 이런 일은 영등할망이 나가는 2월 15일 이후에야 가능했다. 만약 이런 금기를 잘 지키지 않고 빨래를 삶으면 구더기가 생긴다고 믿었다. 3월에는 특별한 행사가 없지만 농사철이어서 성안에 사는 사람들도 주변 밭(서사로 등)을 경작했다. 3월에 고사리꺾기가 있는데 요즘은 축제도 하고 상품가치도 있으니까 팔기도 하지만 1950년대에도 자급자족했다. 제사명절 때 탕쉬로 쓰려면 이웃이 주기도 하고, 본인이 직접 장만해서 먹었다.

4~5월의 세시풍속

4월 한식은 김홍식이 결혼한 후에도 지냈다고 하며 집안마다 지제한 시기가 다르다. 김홍식이 36세(1960년 후반) 정도까지 지냈는데 문중 회의를 거쳐서 지제했다. 한식도 4대 명절(한식, 단오, 추석, 설)이니까 제례는 같으며, 추석처럼 집집마다 지내러 다닌 것이 아니라 집안에서 간단히 지냈다. 집안에 따라서 한식을 지제한 것은 생활환경이 달라지고 이를 준비하는 것도 번거롭게 여겼으며, 이는 원래 중국의 명절이어서 지낼 필요성이 희박해졌기 때문이다.

5월 멩질(제주시에서는 ‘단오’보다는 5월 멩질(명절)이 보편적인 명칭임)은 한식보다 늦게 사라졌으니까 한 1970년대 초까지 지냈다고(집안마다 조금씩 다름) 볼 수 있다. 1970년대 초에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도 있다. 단오는 추석 차례와 같은데 절기상 이때는 농번기라 농가에서는 지내기가 힘들기도 했고 의례간소화 취지에 맞게 문중회의를 거쳐서 지제했다. 5월 단오 때 쑥은 약쑥이 된다고 해서 말려서 배 아픈데 먹어도 좋다는 등 약효가 있다. 이 쑥은 주로 그늘에서 말리는데 1년 내내 매달아 두면서 약재로 이용하기도 했다.

김금심은 젊은 시절에 약이 귀하니까 쑥과 익모초를 고아서 엿기름을 넣고 엿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 당시에 쌀은 귀하고 좁쌀은 많이 재배하니까 이것으로 엿을 자주 만들어 먹었다. 닭엿이나 돼지고기엿도 만들어서 아이들을 먹였으며, 이것이 아주 좋은 영양 간식이었다. 김금심은 엿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서 만들었다. 우선 좁쌀과 엿기름을 이용해서 걸러낸 다음 이 물을 고면서 돼지고기는 통마늘을 넣고 삶은 후에 고깃살을 잘게 찢고 엿기름과 섞어서 다시 고면 엿이 되었다.

6월의 세시풍속

6월에는 ‘ 잡아 먹는 날’(음력 6월 20일)이 있어서 여름철 영양을 보충하기도 했는데 이는 다른 지방의 초복과 같다. 지금도 이 날은 닭 음식을 먹는다. 봄에 병아리를 사다가 마당에서 키우면 중닭이 되니까 식용이 가능했다. 김금심이 경험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1965년경인데 아이들이 어렸을 때 오일장에 가서 닭을 세 마리를 사와서 아이들을 먹이려고 했다. 음력 6월 스무날 먹이려고 미리 사왔다. 그런데 날이 무더워서 병아리를 나무그늘에 두어야 했는데 마당에 있는 풀이라도 뜯어먹으라고 그늘도 없는 땡볕에 놔두니까 더위를 먹어서 죽어버렸다. 그 당시에는 택시도 흔하지 않을 때라 걸어서 오일장(서사라에 오일장이 있을 때)에 가서 다시 닭을 사왔다. 김홍식은 병에 걸려서 죽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 닭을 먹으면 안 된다고 해도 김금심은 오기로 먹었다. 김금심은 지금도 이 사건을 잊지 못한다며 세시풍속을 전해주었다.

“6월 더위는 고냉이 코도 멘도롱다.”(고양이 코는 차가운데 따뜻할 정도로 날씨가 무덥다는 말임)는 속담도 있듯이 ‘닭 잡아 먹는 날’은 아주 더웠다. 김금심은 이 사건 이후 ‘6월 스무날’은 완전히 잊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으며 지금도 초복이나 말복 전후에 닭 음식을 먹는다. 보신탕은 잘 먹지 않았고 말고기는 먹어 보았다. 김금심이 기억하는 것을 들어보면 일제강점기에 군마가 있으니까 말이 죽으면 이 고기를 먹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군인이 우리집에 살았어요. 사도라는 준장이 살았는데 보급 장교라. 겨울인데 한번은 부하가 한 다리를 들고 와서 부엌에 매달아 놓고 우리보고 잘라 먹으라고 했어요. 나는 소다리인 줄만 알았어. 그걸 한번 끊어먹고 한번 끊어먹고 하다 보니 조금 먹게 되었지. 그 당시는 고기 파는 데도 별로 없었고, 동네에서 추렴해서 먹었어요. 그걸 다 먹고 난 다음에 하는 말이 그 고기가 무슨 고긴 줄 알고 먹었느냐고 하니까 나는 소고기 아니냐고 했어요. 그 준장이 웃으면서 소고기가 아니고 말고기라 하더라. 아마 보급 대장이니까 특별히 좋은 걸 가져온 것 같아요. 그 때도 지방질이 없고, 순 살코기만 있어서 고기가 아주 부드럽다는 기억이 있어요. 그렇게 해서 말고기를 먹어봤거든."

일본사람들은 말고기를 아주 좋아했다고 말했다.

제주도에서는 6월에는 “앉은 방석도 움직이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너무 더우니까 6월절 들면 “만지지도 말라. 이사 가지도 말라. 집도 고치지 말라.”는 금기 사항이 있다.

7~8월의 세시풍속

김금심과 김홍식은 7월 백중에 물 맞으러 어리목 쪽에 간 적이 있다고 하며 이곳은 주로 제주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다녔다. 김금심은 1966년까지 며칠씩 집에서 드나들었다. 김금심은 큰딸이라 친정어머니를 보좌해서 다녔는데 이 날 물을 맞으면 신경통에 좋다고 해서 다녔고 나중에는 삼양해수욕장에 가서 검은모래찜질도 했다. 1960년대에는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을 때여서 버스가 운행되는 데까지 간 다음 그 나머지는 걸어서 다녔다. 아침 8~9시에 출발해서 11쯤 도착하면 물을 맞다가 오후 2~3시쯤에 내려왔다. 7월 15일 백중날부터 다니는데 기간은 각자 형편에 맞게 선택한다. 김금심은 4~5회 정도 백중 물맞이를 했다.

8월 추석날은 집집마다 차례를 지내러 다니는데 연하자부터 차례를 지내고 연장자 조상 순으로 올라간다. 일반적으로 밑에부터 지내면서 종손집에서 마친다. 제주도에도 종가 개념이 있지만 다른 지방에 비해서 희박한 편이다. 집안에 따라서 나름대로 종가의 권위가 있지만 지금은 많이 약화되었다. 김홍식 가문에도 종가(제주시 아라동경주 김씨댁)가 있다. ‘큰집’이라고 하는데 문족들이 종가를 받들고, 명절 때에는 전부 종가에 모여서 여러 가지 화합단결을 도모하기도 하고 제사도 같이 지내는 등 가문끼리 결속을 유지했다.

12월의 세시풍속

12월 동짓달에는 메주를 쒔는데 한 사람이 1년에 된장 한 말을 먹는다고 가정해서 만들었다. 김금심도 5인 가족이니까 콩 다섯 말을 준비했다. 콩을 삶는 날을 보는데 ‘쥐날, 뱀날, 소날’은 안 되고 ‘말날, 염소날, 토끼날, 개날’은 좋다.

메주를 만들려면 장콩을 깨끗이 씻어서 물에 3~4시간 담가두었다가 삶는다. 집에서 가마솥에 삶다가 나중에는 방앗간에서 가서 삶아왔다. 방앗간을 이용할 때는 전날 저녁에 물에 불렸다가 사용했다. 삶은 콩을 기계로 쪄서 집에 가져오면 메주 덩어리를 만든다. 메주를 만들 때 짝수로 만들어야 하며 홀수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 사항이 있다. 김금심은 메주를 만들어서 2층 다락방에 매달았다. 메주가 트면 정월 보름까지는 장을 담글 수 없어서 이 기간 전후로 담가야 한다. 그 이유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이런 풍습이 전승되니까 따른 것이다. 그런데 정월 1~15일까지는 설과 보름이 있는 축제여서 장 담그기를 금기했는지도 모른다. 항아리를 씻고 장을 담그는 날도 택일을 하는데 좋은 날이라고 해도 가족의 띠와 같으면 할 수 없으므로 김금심은 이런 금기들을 무시하고 장을 담갔다. 메주를 트면 60~70일이 되면 메주를 건져내고 된장과 간장을 만든다. 너무 오래 담가도 된장 맛이 없으니까 적당한 기간에 건져내고 된장을 만들면 대개 3~4개월 지나면 먹을 수 있지만 1년 정도 묵혀서 먹어야 맛이 있다. 된장은 식량과 같아서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12월 동짓날에는 팥죽을 쒀 먹는데 식구끼리 먹는다. 제주도에서는 주로 양력 12월 15일 지나서 김장김치를 담갔는데 요즘은 김치냉장고가 보급되어서 이런 시기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래도 동지 전에 김치를 담가야 배추가 맛있다고 한다.

[수정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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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 제목 내용
2013.05.02 원고 전체 수정 집필자 수정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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