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114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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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耽羅國 |
영어음역 | Tamnagu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 |
집필자 | 김동전 |
[정의]
5세기 말~10세기 백제·중국·일본 등과의 국제 교역을 하면서 ‘국(國)’을 형성 기반으로 하였던 제주의 옛 정치체.
[개설]
탐라국은 ‘섬나라’라는 의미로서, 섬에 위치하여 오랫동안 독자적인 국가 형태로 존속하였던 국가이다.
[기록]
탐라국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舊唐書)』 「유인궤전(劉仁軌傳)」에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이미 『후한서(後漢書)』에는 섭라(涉羅), 『북사(北史)』나 『수서(隋書)』의 「백제전」에는 탐모라국(耽牟羅國), 『신당서(新唐書)』 등 국내외 사서에는 담라(儋羅), 혹은 탐부라(耽浮羅)·탁라(乇羅)·탁라(托羅)·탁라(託羅)·둔라(屯羅) 등이 나타나 있다.
특히 어의(語義)에 대해서는 이미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에서 동국방음(東國方音)에 도(島)를 섬[剡]이라 하고 국(國)을 나라[羅羅]라 하며 탐·섭·담 세 음은 모두 섬과 비슷하다고 풀이한 바 있다.
[관직 체계]
성주·왕자·도내(徒內) 등은 탐라 지배층의 호칭이다. 기록상으로는 신라 전성기에 고을라의 15대손 고후(高厚)·고청(高淸)·고계(高季) 세 형제가 바다를 건너 신라에 와서 조회하자 신라의 왕이 이들을 가상히 여겨 성주·왕자·도내의 작위를 주었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특히 성주는 국왕을 지칭한 것으로 고려에서도 신라의 예에 따라 탐라국의 왕을 성주라고 불렀다. 『고려사(高麗史)』 태조세가 21년(938) 12월조에 의하면, 탐라국의 태자 말로(末老)가 와서 알현하자 왕은 그에게 성주·왕자의 작위를 주었다고 하였다.
또한 고려에서는 성주를 회유하기 위해 운휘대장군(雲麾大將軍) 등의 무산계를 주어 우대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성주는 거의 독립적인 자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들을 태자 또는 세자라 하였다.
성주와 왕자는 1105년(숙종 10) 이후 제주가 군·현으로 편제된 뒤에도 여전히 존재하여 대대로 그 지위를 세습하며 조선 초기까지 내려 왔다. 그러나 1402년(태종 2)에는 중앙의 행정력이 제주에 미치게 되면서 성주를 좌도지관, 왕자를 우도지관으로 개칭하였고 이 때부터 이전과 같은 대우는 없어졌다.
성주와 왕자의 직능(職能)에 대해서는 “성주는 종래의 기록과 같이 신라 때 있어서 객성상(客星象)의 출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며 탐라란 나라 이름도 탐진(耽津)에 당도한 데서 연유한 것이 아니다.
성주는 탐라국 토어로 국왕 또는 임금의 뜻이며 왕자는 군장의 뜻을 가진 탐라의 토어이다. 따라서 성주는 국왕이요, 왕자는 부왕적인 존재로서 탐라국은 이 양자가 다스리는 이원적인 왕제를 가진 나라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관아터]
제주시 삼도2동 43번지 외 23필지에 위치한 유적으로 사적 제380호로 지정되어 있는 제주목 관아는 1416년(태종 16) 제주도가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삼읍으로 나누어지기 이전 탐라국의 관아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외 교역]
1928년 제주시 산지항 공사 때 부근의 용암(熔岩) 아래에서 우연히 중국 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화폐로는 오수전(五銖錢)·화천(貨泉)·대천오십(大泉五十)·화포(貨布)가 발견되었다.
이 중 오수전은 전한 무제 때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왕망의 신(新)나라 때에도 사용되었으며 화천·대천오십·화포 등은 모두 왕망 때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산지항 부근 유적의 성립 시기는 왕망 시대 이전으로는 소급할 수가 없다
다만 경상남도 김해 패총이나 전라남도 군곡리 패총, 그리고 일본의 북구주 지방에서 화천이 발견되었던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산지항 출토 유물은 대륙으로부터 금속기 문화가 남진(南進)해 온 경로를 유추해 볼 수가 있다.
그 유전(流傳) 시기는 왕망 때 만들어진 화천·대천오십·화포 따위가 후한에 이르러서는 모두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후한 초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더욱이 오수전은 마산 성산 패총, 한경편(漢鏡片)은 고성 동외동(東外洞) 패총에서 각각 발견된 예로 보아 당시 제주도 토착인들이 주로 이들 지역과 교역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제주시 용담동에서는 단검(短劍), 장검(長劍), 철부(鐵斧) 그리고 유리구슬 등이 출토되었다. 이 출토 유물들은 실제 전투용의 무기들이 아니라 그 소유자가 자기의 고귀한 신분을 과시하고 장식하는 위신재(威信財)라는 성격을 갖는다.
출토된 물품들의 시기는 같이 동반되는 중국 제품으로 추정되는 40여 점의 유리구술들로서 보아 전한대에 해당된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출토된 물품들 또한 적어도 기원후 1세기경 제주도 지배 세력이 한반도를 경유하거나 직접 중국과 교역해서 들여온 것이다.
[대외 관계]
탐라국이 국내외 사서에 정식으로 등장한 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476년(문주왕 2) 백제 문주왕에게 방물을 바쳤다는 데서이다. 그 후 탐라국은 고려 전기인 1162년(의종 16) 현령관이 고려 중앙에서 파견되어 올 때까지 국내 사서에는 10회 정도, 중국 사서와 일본 사서에서는 각각 7회와 19회 정도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탐라국에는 왕, 왕자, 그리고 백제의 중앙 관위인 은솔(恩率)이라든지 좌평(佐平) 직책을 가진 존재들이 있었다. 이 사실은 탐라국 내부에 그 구성원들이 위계적으로 배치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상당히 계층 분화된 사회 체제와 그것을 통제하는 상부 구조가 존재하였음을 보여 준다. 더구나 그것을 종주적 위치에 있는 백제라는 해외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탐라국은 하나의 ‘국(國)’으로서 동북아시아라는 당시 국제 사회에서 상당히 높은 국제적인 위상을 갖고 있었다. 그 예를 보면, 『자치통감(資治通鑑)』 고종 인덕 2년조(665년)에 신라·백제·탐라·왜국 사자들이 중국 태산에 모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7세기라는 시점에서 사자들의 서열을 살펴보면, 탐라국의 지위가 일본보다 앞서고 있었으며 다른 세 나라들과는 거의 대등하게 보인다. 또한 실례로서 신라 27대 선덕왕이 황룡사 구층탑을 세워서 이웃 나라의 침략을 막으려고 했을 때 탐라는 신라의 잠재적인 적대국들 중 제4위에 속하였다. 따라서 당시 신라 당국도 탐라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