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26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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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最彦 |
영어음역 | Hwang Choeeon |
이칭/별칭 | 양백(良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나영 |
[정의]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양백(良伯). 아버지는 황수태(黃壽泰)이며,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1735년(영조 11) 증광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1777년(정조 1) 3월 유혁(柳爀)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고 1778년(정조 2) 12월에 떠났다. 함께 재임한 제주판관은 김광현(金光鉉)[1722~?], 경내운(慶來運)[1723~?], 정의현감은 허견(許堅), 대정현감은 김도혁(金道赫), 김중옥(金重玉)[1735~1780] 등이었다.
제주목사 재임 중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1동에 있는 관덕정(觀德亭)[보물 제322호]을 중수하고 삼읍(제주목·대정현·정의현)에 학전(學田)을 설치하여 선비를 가르쳤고, 정의서당을 정의향교의 명륜당 남쪽에 창건하였다. 또한 접생(接生)을 신설하였고, 폐장세곡(廢場稅穀)으로 재생의 늠료(凜料: 일종의 봉급)에 충당하였다.
정의서당 훈장을 지낸 오봉조(吳鳳祚)[1730~1815]가 지은 「정의서당 발문(旌義書堂跋文)」이 현재 전해지고 있으며, 서울에 있는 성균관의 주자(朱子) 필체 편액을 모사하여 온 것을 제주향교 명륜당에 게시하였다.
1777년(정조 1) 정조의 즉위를 반대하였다가 정조가 즉위하자 제주로 유배를 온 홍계능(洪啓能)[?~1776]과 홍찬해(洪纘海)[1737~1777] 및 윤태연(尹泰淵) 등을 잘못 감시한 죄로 감봉당한 일이 있다.
『정조실록』 1777년 6월 5일 기사에 따르면 “홍계능의 악(惡)이 비록 돌아보아 꺼리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도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을 품고, 갈수록 더욱 발호하고 있다. 명색이 천극(荐棘: 중죄인이 유배된 집 둘레에 가시 울타리를 쳐서 외출을 못하게 하던 형벌)인데 친속(親屬)들을 데리고 들어갔으니 이를 금하지 않은 도사(都事)는 진실로 말할 것도 없는 것이고 홍계능의 죄악은 더욱 벗어날 수 없게 되었으니, 천극을 엄히 가하라.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홍찬해(洪纘海)·윤태연(尹泰淵) 등의 천극도 알만하다. 이 뒤에 마땅히 적간(摘奸: 죄를 캐어 밝힘)이 있겠으나 또한 해당 도백(道伯)을 엄히 신칙하도록 할 것이며, 목사(牧使)는 잘 검칙하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다. 전라도관찰사 이보행(李普行)은 추고(推考)하고 제주목사 황최언은 월봉(越俸) 5등을 하라.”라는 어명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