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25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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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承舜 |
영어음역 | Han Seungsu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정의]
조선 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 아버지는 예의판서 한리(韓理)이다. 아들은 한서룡(韓瑞龍)·한서봉(韓瑞鳳)·한서구(韓瑞龜) 등 3명이다.
[활동사항]
1437년(세종 19) 2월 최해산(崔海山)의 후임으로 제주에 부임하였다. 제주목사로 부임하기 전, 의정부에서 제주 방어는 중요하므로 봉화·척후(斥候)를 엄하게 하고 군대를 정비하여 왜선이 정박할 요해처를 잘 방어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듬해인 1438년(세종 20) 제주목사 한승순은 조정에 제주 방어 대비책에 대한 장계를 올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참역(站驛)은 제주목에 3개소, 정의현에 2개소, 대정현에 1개소를 설치하고 전토(田土)를 주어 참부(站夫)를 보충군으로 삼는다. 군인이 주둔하는 방어소의 경우, 김녕소는 153명, 조천관소는 103명, 주읍의 성내 수어소·좌우소·독소는 1,329명, 도근천소는 144명, 애월소는 144명, 명월소는 192명, 차귀소는 75명, 대정현 수성 3소는 483명, 수산소는 175명을 배치하여 번갈아가면서 방어한다.
이러한 방어소 외에 왜구가 정박할 우려가 있는 곳은 김녕부터 조천관까지 3개소, 조천관부터 제주성까지 7개소, 동해로부터 서귀까지 3개소, 서귀로부터 정의까지 3개소, 수산부터 김녕까지 5개소가 있는데, 이곳에 공사 노비 및 소속 정군·봉족(奉足) 등을 각각 50~60명 혹은 100명을 번갈아 배치하여 방어한다.
봉화·후망(堠望 : 높은 곳에 올라가 멀리 살펴보며 경계함)의 경우, 제주목의 동쪽 김녕부터 서쪽 판포에 이르는 곳 10개소, 대정현 서쪽 차귀부터 동쪽 거옥(居玉)에 이르는 곳 5개소, 정의현 서쪽에서 북쪽 지미산에 이르는 곳 7개소에 하나의 봉화대마다 5명을 나누어 배치하여 방어한다.
연대(煙臺)의 높이와 너비는 각각 약 316㎝으로 한다. 후망인에게는 무기 및 기(旗)·나발을 가지고 올라가게 하며 적의 공격이 있으면 봉화를 올리고 나발을 불어서 널리 알린다. 적이 상륙하면 육군이 격파하고 수군이 협공하다가 왜적을 추격하여 나포하도록 한다.
또한 정의현 동쪽 우봉과 대정현 서쪽 죽도(竹島)[차귀도]는 왜선이 몰래 정박하는 요해지인데, 우도 인근의 수산과 죽도 인근과 서귀방호소는 모두 성곽이 없어 왜구가 밤에 침범하면 군인이 의지할 지형, 지물이 없어 응전하기가 어려우므로 축성이 필요하다. 왜구를 제압하는 데는 마병(馬兵)이 매우 중요하니, 만약 봉명사신 및 군기(軍機)의 긴급한 일이 있으면 그 토지의 다소에 따라 말을 차등 있게 내놓게 하여 마병을 강화한다.
이상과 같은 방어책이 모두 실현되었는지는 않았으나, 제주목사 재임 시절에 방호소 12개소와 수전소(水戰所) 10개소가 설치되었다. 1439년(세종 21) 윤 2월에 첨지중추원사에 임명되어 떠났다. 1447년(세종 29) 중추원부사 재임 중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