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2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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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國戰爭-避難民 |
영어음역 | Hangukjeonjaenggwa Pinanmi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찬식 |
[정의]
한국 전쟁 중 육지에서의 전화(戰禍)를 피해 제주로 몰려온 피난민.
[전시 체제로의 전환]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7월 8일 전국적으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제주도에서는 4·3 사건의 마무리 토벌을 위해 주둔하던 해병대 신현준 사령관이 제주 지구 계엄 사령관을 겸임하였다.
정부는 7월 16일 제주 주정 공장에 육군 제5훈련소를 설치해 신병 양성에 나섰다. 8월 3일 중고생으로 조직된 학도 돌격대가 결성되었고, 이들을 비롯한 제주도 청년들 3천 명이 8월에 해병 3·4기로 지원 입대하였다. 이들은 9월 인천 상륙 작전에 투입되어 서울 탈환에 나섰고, 9월 27일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렸다.
1951년 3월 21일 기존의 대구 제1훈련소, 부산 제3훈련소 및 제주의 제5훈련소를 통합하여 육군 제1훈련소(소장: 백인엽 소장)를 대정읍 상모리에 설치하였다. 이와 함께 미군 제5공군 군고문단이 주둔하게 되었다.
동시에 제주에는 위수 지구 사령부가 설치되어 제주 지역의 경비, 육군의 질서 및 군기의 감시, 육군 소속 건축물 및 시설의 보호에 관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제주도 위수 지구 사령부는 제주도 일원의 경비를 담당하고 군사 시설을 보호할 책임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남아 있던 재산 무장대 토벌 작전에 부분적으로 참여했다.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에서 양성된 병력은 50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제1훈련소에도 수많은 제주 청년들이 입대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육군과 해병대에 입대해 참전한 제주 청년들은 1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피난민과 토착 주민의 갈등]
한국 전쟁으로 제주 사회는 또 한번 격변하였다. 4·3 사건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제주에는 엄청난 수의 피난민들이 밀려들었다. 전쟁 20일 만인 7월 16일 제주항·한림항·성산항·화순항을 통해 1만여 명이 들어왔다.
1951년 초 ‘1·4 후퇴’ 뒤 이북 주민들을 주축으로 수만 명의 피난민이 제주에 왔다. 피난민 수는 1951년 1월 3일까지 1만6천여 명에 불과했으나, 1월 15일에는 8만7천여 명, 5월 20일에는 무려 14만8천여 명에 이르렀다. 제주도 원래 인구의 절반을 넘어섰다.
피난민의 급격한 증가로 주택난·식량난이 닥쳐왔다. 특히 1952년 가을부터 다음해 봄까지 이어진 절량(絶糧) 사태는 제주 사회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북제주군 지역에서만 3만 명이 끼니를 잇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정부의 구호곡이 배정되었지만 이를 둘러싸고 피난민과 4·3 이재민 사이에 심각한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절량 농가가 속출하자 제주도 당국은 피난민 구호곡의 일부를 4·3 이재민에게 배정해 달라는 읍·면장들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런 과정에서 피난민과 토착 주민 사이에 갈등을 심각하게 드러낸 ‘설화(舌禍)’ 사건이 발생하였다. 1953년 2월 10일 제주읍 관덕정 광장에서 2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피난민 대회에서 피난민들은 자신들에게 배당된 구호곡의 일부를 4·3 사건 이재민에게 돌린 것은 부당하다고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연사로 나선 김명수는 도의회 의장과 김모 의원을 빨갱이로 몰아붙이고는 제주도에 계엄령 선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발언 때문에 도민들은 거세게 반발하였다. 결국 피난민대회준비위원장을 맡은 도의회 김상흡 의원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며칠 뒤 ‘원주민’과 피난민 대표의 간담회가 열려 “상호 친목에 더욱 힘쓰자”고 결의하였고, 도의회[의장: 전인홍]가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섰다. 결국 구속됐던 김명수는 석방되고, 김상흡 의원의 사퇴서는 반려되었다. 이 설화 사건은 외래 피난민들 가운데 제주 토착민들을 경시하는 인식 때문에 일어났지만, 그 밑바닥에는 4·3 사건 때문에 야기된 토착민과 외래인의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중공군 포로의 수용]
피난민들 외에 또 다른 외부인들이 제주에 들어왔다. 중공군 포로들이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포화 상태에 이르자, 1952년 4월부터 5월 사이에 8만2천여 명의 본국 송환 거부 포로 및 민간인 억류자들이 육지에 세워진 4개의 새 수용소와 제주도로 이송되었다.
이들 가운데 송환 거부 중공군 포로들은 제주도 모슬포에 새로 세워진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이어서 7월에 송환 희망 중공군 포로들이 제주읍에 설치된 포로수용소에 이송되었다. 1952년 8월 현재 제3수용소[모슬포 산이수동]에 송환거부 중공군 14,000명이, 제3수용소 분소[제주읍 비행장]에 송환 희망 중공군 5,887명이 수용되었다.
1952년 10월 1일 제주읍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중공군 포로들이 시위를 전개하자, 미군 보병대가 발사하여 포로 45명이 사망하고 120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들 중공군 포로의 수용으로 모슬포 산이수동 주민들이 삶터를 잃고 소개 생활을 하는 등 한국 전쟁은 제주도민들에게 직접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