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22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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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中山間地域焦土化作戰 |
영어음역 | Jungsangan Jiyeok Chotohwa Jakjeon |
영어의미역 | Jeju Inland Area Strike Operation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장윤식 |
성격 | 토벌 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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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48년 11월 17일 |
관련인물/단체 | 송요찬|경비대 제9연대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에서 발생한 4·3 사건을 진압하면서 토벌대가 취한 작전.
[개설]
제주 지역 4·3 사건을 조기에 진압하기 위해 정부는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제주도의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지역을 적성 지역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이 범위에 포함된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주민들을 해안 마을로 소개(疏開)시키는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역사적 배경]
1948년 4월 3일 단선 단정(單選單政)을 반대하면서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가 무장봉기를 일으킨 이후 제주도에 대한 대규모 진압 작전은 “딘 군정 장관을 비롯한 중앙 정권 측에서 미리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제주 경찰 고위 당국자가 증언한 것처럼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단독 정부가 수립된 순간부터 정해진 것이었다.
한 학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부터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 문제가 아니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고, 주한 미군 철수를 앞두고 있던 미국에게는 냉전 초기 자신들이 구축하려는 세계 질서에 가장 큰 걸림돌로 등장했다고 분석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사태의 조기 진압을 위해 초토화 작전이라는 강경 진압 작전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목적]
4·3 사건 당시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변 마을로 소개(疏開)시키고, 해변 마을에는 주민 감시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무장대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취지에서 시행되었다.
당시 이범석 국무총리의 국회 보고에 따르면 다수의 제주도민들이 ‘폭도의 정신적 가담자’라는 전제 아래, 주민들을 해안 마을로 집단 이주시킨 후 ‘보갑제(保甲制)’라는 연대 책임식 주민 감시 체계를 구축해 일반 주민과 무장대를 차단시키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경과]
제주도에 대한 강경 진압 작전의 징후는 정부 수립을 전후로 곳곳에서 포착됐다. 중앙 당국에서 강경 진압을 준비하고 있다는 김봉호 제주 경찰 감찰 청장의 설명도 있었지만, 이 발표 이전에 이미 800명의 지원 경찰이 8월 28일 제주도로 출발했다.
또 제주 출신의 김봉호 제주 경찰 감찰 청장을 10월 5일자로 사퇴시키고 그 후임에 평남 출신의 홍순봉(洪淳鳳)을 발령했다.
미 군사 고문단도 토벌대의 개편을 주문했다. 주한 미군사 고문단장 윌리엄 로버츠(Willam L. Roberts) 준장은 1948년 10월 9일 광주 제5여단 고문관 트리드웰 대위에게 보낸 공문을 통해 “현재 제9연대의 전술·병참 지원은 제5여단에 위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이는 즉각 현실화됐다. 10월 11일 광주 제5여단장 김상겸 대령을 사령관으로 하는 제주도 경비 사령부가 창설된 것이다. 그러나 10월 19일 제주도에 파병될 예정이던 제5여단 예하 부대인 여수의 제14연대가 총부리를 돌려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김상겸 여단장은 제주도 경비사령관에 임명된 지 8일 만에 문책·파면됐다.
후임으로 임명된 송요찬 제9연대장은 제주도 경비사령관까지 맡게 되어 제주 지역에 배속된 군부대뿐만 아니라 제주 경찰과 해군 함정까지 지휘하는 진압군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진압 체제를 새로 정비한 당국은 1948년 11월 중순경 강경 진압 작전을 전개했다. 중산간 마을 거주자에게 통행금지를 포고하면서 이를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총살에 처하겠다는 작전이었다.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 방화에 앞서 주민들에게 소개령(疏開令)을 내려 해변 마을로 내려오도록 했다. 그러나 일부 마을에는 소개령이 전달되지 않았고, 혹은 채 전달되기 전에 진압군이 들이닥쳐 방화와 함께 총격을 가하는 바람에 남녀노소 구별 없이 집단적으로 희생을 당했다.
이때 집을 잃고 겨우 목숨만 건진 주민들 중 상당수가 두려움 속에서 해변 마을로 내려가지 못한 채 산간 지역에 은신하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다.
[결과]
1948년 11월부터 제9연대에 의해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시킨 강경 진압 작전은 4·3 사건 전개 과정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태를 초래했다. 이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4·3 사건으로 소각되었던 가옥 3만 9,285동 중 대부분이 이때 방화된 것이었다. 결국 이 강경 진압 작전은 생활의 터전을 잃어버린 중산간 마을 주민 2만 명 가량을 산으로 내모는 결과를 빚었다.
한편 이 무렵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사건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피해 마을은 세화리, 성읍리, 남원리 등으로 30~50명씩 희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