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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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濟州道人民遊擊隊 |
영어음역 | Jejudo Inmin Yugyeokdae |
영어의미역 | Jeju Partisan Unit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장윤식 |
[정의]
제주 4·3 무장봉기를 일으켰던 남조선 노동당 제주도 위원회의 군사 조직.
[개설]
1947년 3·1 사건으로 제주도에서 사상자가 발생하고 이에 항의하는 총파업이 벌어지자 정부는 응원대를 제주도에 급파하여 진압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서북 청년단 등에 의해 무자비한 대량 검거·구타·고문이 자행되고 남로당원이 대거 검거되는 사태가 이어지자 남조선 노동당 제주도 위원회는 조직 자체가 붕괴될 수 있는 위기 상황으로 내몰렸다.
1948년 들어 고문 치사 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 ‘앉아서 죽느냐, 일어서 싸우느냐’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됐다. 여기에 남한만의 단독 선거라는 유엔의 결정이 맞물리면서 무장봉기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1948년 3월 15일부터 25일까지 무장봉기에 필요한 200명 예정의 자위대를 조직하고, 보급과 무기 준비, 선전 사업 강화 등 책임을 분담하여 준비하기로 했다. 준비 기한을 며칠 넘긴 3월 28일 재회합 때에 이르러 주력 부대인 유격대 100명, 후속 부대인 자위대 200명, 도 군사위원회 직속 특경대 20명 등 320명의 최초 봉기 인원을 조직했다.
[변천]
유격대의 조직은 준비가 원활치 못했고 더디게 진행됐지만 3월 15일을 전후로 무장 부대로서 유격대와 후속 부대로서 자위대를 동시에 준비하고 조직했으며 이들 무장 조직과 비무장 조직은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남조선 노동당 제주도 위원회의 도당 사령부는 급박하게 무장 투쟁 국면을 맞게 됨으로써 부족했던 점을 조직 운용을 통해 보완하기 위해 1948년 4·3 봉기 직전부터 그해 7월 25일까지 무려 5차에 걸쳐 조직 체계를 바꿨다. 유격 투쟁이 본격화되면서 군사부가 눈에 띄게 강화되고 보급과 정치·군사 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수시로 조직 부서를 개편했다.
주요 활동 지역을 세분해 만들어진 지대(支隊)는 1948년 5월 말부터 편성되었으며 초기에는 제30지대[제주읍], 제31지대[애월면, 중문면, 서귀면], 제43지대[한림면, 대정면, 안덕면], 제50지대[조천면, 구좌면, 성산면, 표선면, 남원면] 등 4개 지대로 나뉘었다. 지대 명칭 중 숫자 30은 1947년 3·1 발포 사건에 항의하는 총파업을 시작했던 3월 10일, 31은 1947년 3·1 기념 집회, 4·3은 4·3 무장 봉기, 50은 5·10 단선 거부 투쟁을 기리는 숫자로 보인다.
봉기 초기의 무기는 소총 30여 정과 죽창 등 재래식 무기에 지나지 않았으나 9연대 장병의 집단 탈영 후 입산 및 경찰 지서 습격 등으로 무기를 보강했다. 인원은 초기 봉기 인원 320명에서 이후 최대 500명 정도로 늘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제주도 인민유격대는 1948년 8월 정부 수립 후 강경 진압 국면에도 상황 변화에 따라 잦은 조직 개편을 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도 인민유격대는 1949년 3월 이후 궤멸 단계에 접어들었으며, 제2대 유격대 사령관 이덕구가 1949년 6월 9일 사살됨으로써 사실상 무장 투쟁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잔여 세력은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직후 민간인을 납치하여 그 세력을 잠시 확대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목숨을 보전하는 도피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 군경의 끈질긴 토벌과 귀순 공작으로 전사자와 이탈자가 속출했으며 1957년 4월 2일 최후의 유격대원 오원권이 생포됨으로써 제주도 인민유격대의 활동은 막을 내렸다.
[활동 사항]
제주도 인민유격대의 초기 활동은 ‘조직의 수호와 방어 그리고 5·10 단독 선거 단독 정부 반대’를 위한 활동으로 집약되었다. 그들은 무장봉기를 일으킨 4월 3일 새벽 2시경 제주도 내 24개 경찰 지서 가운데 제1구[제주] 경찰서 관내 화북·삼양·조천·함덕·세화·외도·신엄·애월·한림 지서와 제2구[서귀포] 경찰서 관내 남원·성산·대정 지서 등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이날 이들의 공격으로 경찰관이 사망 4명, 행방불명 2명, 부상 6명의 피해가 있었다. 또 우익 인사 등 민간인 8명이 희생되고 19명이 부상했다.
5·10 선거를 전후해서 선거 관리 위원을 겨냥하여 피습하거나 투표소를 공격하고 주민들을 대거 입산시키는 등 단독 선거 거부를 위한 활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해 제주도의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에서 선거 거부를 주도했다. 이후에는 인민 공화국 수립을 위한 지하 선거를 주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비무장의 우익 인사 및 이들 가족을 살해했으며, 1948년 하반기 들어 구좌면 세화리, 남원면 남원리·위미리·하예리, 표선면 성읍리 등 일부 마을을 습격해 무차별적인 살상을 저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