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630 |
---|---|
한자 | 李在頀 |
영어음역 | Yi Jaeho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보경 |
[정의]
조선 말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활동사항]
1901년(고종 38) 4월 이상규(李庠珪)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902년(고종 39) 6월까지 재임하였다. 주사 최창순(崔昌淳)과 함께 프랑스 군함을 타고 인천을 출발하여 제주에 도착하였다. 도착 즉시 대정군수 채구석(蔡龜錫)[1850~1920]으로부터 유림 오대현(吳大鉉)과 관노 출신인 이재수(李在守) 등이 제주성을 점거하고 천주교 신자들을 살해한 신축민란(이재수의 난 또는 제주교난)에 대한 상황을 보고받았다.
또한 제주에 입항한 프랑스의 군함 랄루에뜨호의 함장 발로이와 라 쉬르프리즈호의 함장 모네와 함께 민란으로 학살된 천주교 신자의 매장 장소에 대해 논의하여 사라봉 남쪽 황사평에 안장하기로 합의하고 묘지 구역을 획정하였다.
제주목사 재임 중 제주재판소에 검사보(檢事補)를 두고 우체사(郵遞司)에는 주사를 두는 등 근대적 개혁을 이끌었으나, 부자들로부터 함부로 물건을 징수하고 탐욕스러워 백성의 원성이 자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