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6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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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翊漢 |
영어음역 | Yi Ikhan |
이칭/별칭 | 여익(汝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진소정 |
[정의]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익(汝翼). 아버지는 이상연(李尙淵)이다.
[활동사항]
1700년(숙종 26) 춘당대 문과에서 장원급제하였다. 1704년(숙종 30) 사헌부장령을 지냈으며, 1709년(숙종 35) 임양군(臨陽君)이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에 갔을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여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710년(숙종 36) 사헌부헌납을 거쳐 다시 장령에 임명되었는데, 장령 재임 시 재략만 있으면 신분적 제한을 초월하여 발탁하자고 주장하여 숙종의 호의적 반응을 얻었다. 1711년(숙종 37) 5월 백시구(白時耈)[1649~1722]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713년(숙종 39) 7월에 떠났다.
제주목사 재임 중인 1711년 8월에 큰 태풍으로 신촌리 민가 78채가 수몰되었으며, 1712년(숙종 38) 8월에는 대정현 형제도 앞바다에 있는 민가 66채가 모래와 자갈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1713년 봄에 방어사와 교수를 겸직하게 되었다.
1714년(숙종 40) 좌부승지를 거쳐 1722년(경종 2) 강원도관찰사로 나갔으며, 1724년(경종 4) 경기도수군절도사가 되어 양역(良役)의 고통과 백성의 부담을 줄이도록 상소하였다. 1727년(영조 3) 병조참판을 지낸 후 1729년(영조 5) 동지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