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6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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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源祚 |
영어음역 | Yi Wonjo |
이칭/별칭 | 주현(周賢),응와(凝窩),이영조(李永祚)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진소정 |
[정의]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凝窩), 초명은 이영조(李永祚). 생부는 이형진(李亨鎭)이며, 양부는 이규진(李圭鎭)이다.
[활동사항]
1809년(순조 9)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37년(헌종 3) 사간원정언을 지냈으며 재임 중 극에 달한 사족의 사치와 흉년으로 인한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에 대한 쇄신책 강구를 간하였다. 1841년(헌종 7) 강릉부사 재임 중 구재룡(具載龍)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843년(헌종 9) 6월 사임하였다.
제주목사 재임 중 1841년 3월 노인(路引: 관아에서 병졸이나 보통 장사하는 사람 또는 외국인에게 내주던 여행권) 발급과 관련하여 공적인 일로 출륙(出陸)하는 자는 각 청 상급자가 확인하고, 행상인과 사적인 일로 출륙하는 자는 소지(所志) 말단에 날인을 받도록 하였다. 7월에 큰 태풍이 불어 기근자가 많이 생겨 호남 지방의 창미(倉米) 2천 5백석을 요청하여 기민에게 나누어 주었고, 1,170석을 방출하여 환모곡(還耗穀)에 충당하였다. 1842년(헌종 6) 우도와 가파도에 방목했던 우마(牛馬)를 부근 목장으로 옮기고, 그 땅을 개간한 경작자에게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였다.
1842년 대정현성 동문 밖에 동계정온적려유허비(桐溪鄭溫謫廬遺墟碑)를 세웠고, 1843년에는 송죽사(松竹祠)를 건립하고 정온(鄭蘊)[1569~1641]을 봉향하게 하였다. 송죽사 현판은 당시 대정현에 유배 중이던 추사가 썼다. 동계정온적려유허비의 비문 끝에 “여어선생외예 모선생공이 하감사(余於先生外裔 慕先生公耳 何敢私)”라는 내용으로 보아 이원조는 정온의 외손인 듯하다.
1843년 영혜사 동쪽 귤림서원(橘林書院) 곁에 향현사(鄕賢祠)를 창건하고 고득종(高得宗)[1388~1460]의 위패를 모셨으며, 삼천서당(三泉書堂)을 중수하였다. 목민관으로서 유생들에게 열흘에 한 번씩 시험을 실시하거나 또는 망경루(望京樓)에서 유생 69명에게 시취(試取)를 실시하여 각 학당(學堂)에 머무르도록 하고, 제주목·대정현·정의현 백성에게 권선징악을 가르쳤다.
[학문과 사상]
학문은 영남 퇴계학파에 속하며, 대정현에 유배 중이던 김정희와 만나 상서위고문십육언(尙書僞古文十六言)에 대해 서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저술과 작품]
「효자박계곤행적기(孝子朴繼崑行蹟記)」, 「한라산 유산가(漢拏山遊山歌)」, 「연희각기(延曦閣記)」, 「정온적려유허비문(鄭蘊謫廬遺墟碑文)」, 「홍화각중수기(弘化閣重修記)」, 「송죽사상량문(松竹祠上樑文)」, 「삼천서당중수기(三泉書堂重修記)」 등이 있다.
이 밖에 제주도에 관한 내용을 편술한 『탐라지(耽羅誌)』,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 『탐라관보록(耽羅關報錄)』, 『탐라계록(耽羅棨錄)』 등이 있다. 이원진이 지은 『탐라지(耽羅誌)』를 ‘구탐라지’라 통칭하고, 이원조가 지은 것을 ‘신탐라지’라 한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매화산에 있으며, 신도비는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