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602 |
---|---|
한자 | 李約東 |
영어음역 | Yi Yakdong |
이칭/별칭 | 춘보(春甫),노촌(老村),평정(平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순만 |
[정의]
조선 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춘보(春甫), 호는 노촌(老村). 아버지는 호조판서에 증직된 이덕손(李德孫)이다.
[활동사항]
1441년(세종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 1) 증광시 문과에 정과(丁科)로 급제하였다. 1458년(세조 4) 지평이 되고 1459년(세조 5) 사직하였다가 1464년 선전관으로 복직하였다. 1466년 종부시정을 거쳐 구성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470년(성종 1) 10월 김호인(金好仁)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제주목사 재임 중 이속(吏屬들)의 부정과 민폐를 단속하여 근절시켰고, 공물의 수량을 감하고 세공을 감면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한라산신제를 산천단에서 행하게 하여 제주도민들이 산신제를 지내다가 동사(凍死)하는 폐단을 시정하였다.
1473년(성종 3) 8월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어 제주목사를 그만두고 떠날 때, 제주에서 사용하던 모든 물건을 두고 갔다. 이약동이 사용하던 말채찍은 관덕정에 오랫동안 걸려서 청백리의 상징으로 제주도민들로부터 칭송받았다.
1474년(성종 5)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1477년(성종 8) 대사헌이 되어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8년(성종 9)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1486년(성종 17)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487년(성종 18) 한성부좌윤·이조참판 등을 거쳐 1489년(성종 19)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다가 1491년(성종 22)에 지중추부사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저술 및 작품]
『노촌실기(老村實記)』가 있다.
[상훈과 추모]
김산의 경렴서원(景濂書院)과 제주도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되었고, 성종 때 청백리로 뽑히고 『기영록(耆英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