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5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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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适 |
영어음역 | Yi Gwal |
이칭/별칭 | 백규(白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나영 |
[정의]
조선 중기 대정현감·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개설]
1622년(광해군 14)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부임할 때 친분이 있던 신경유(申景𥙿)[1581~1633]의 권유로 광해군[1575~1642]을 축출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하여, 1623년(광해군 15) 3월에 일어난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세웠다.
인조반정 후 정사공신 2등에 녹훈되어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가 평안북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가 되어 영변에 부임하였다. 이괄은 반정 후 주도 세력과의 불화로 인사에 불만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들 이전(李旃)이 공신들의 횡포 때문에 시정이 어지러워졌다고 말한 것에 대해 사실 여부를 조사한다는 이유로 서울에서 선전관과 의금부도사 등이 평안북도 영변에 내려오자 이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1624년(인조 2) 1월 구성부사 한명련(韓明璉)[?~1624]과 합세하여 서울로 진격하여 2월 입성하였다. 이괄은 인조가 공주로 피난을 갔기에 선조의 열 번째 왕자 흥안군 이제(李堤)[?~1624]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장만(張晩)[1566~1629]과 정충신(鄭忠信)[1576~1636] 등이 이끄는 관군과의 안현(鞍峴)[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재] 싸움에 참패하여 경기도 이천까지 달아났다가 부하 기익헌(奇益獻)과 이수일(李守一)[1554~1632]에게 암살당하였다.
[활동사항]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한 뒤 형조좌랑·태안군수를 역임하였다. 1603년(선조 36) 11월 이신(李愼)의 후임으로 대정현감이 되었다. 1616년(광해군 8)에 현즙(玄楫)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고 1618년 떠났다.
제주목사 재임 중인 1616년(광해군 8) 10월 죄인 억례(億禮)가 유배되었고, 1616년 12월 죄인 정충남(鄭忠男)은 대정에, 순경(順慶)은 정의에 유배되었다. 정충남은 서양갑·박응서 등과 함께 경상북도 조령에서 경상(京商)을 죽이고 금품을 약탈하다가 잡힌 인물이다.
1617년(광해군 9) 9월 김만일(金萬鎰)[1550~1632]이 말 수천 필을 헌납하자 이를 포상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11월 전 사간원정언 이익(李瀷)[1579~1624]이 제주로 유배되었고, 같은 달 김제남의 처 노씨부인이 유배되었는데 호송하는데 소홀하지 말라는 조정의 지시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