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5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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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慶祿 |
영어음역 | Yi Gyeongrok |
이칭/별칭 | 완풍부원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나영 |
[정의]
조선 중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오위장 이간(李幹)이다.
[활동사항]
1576년(선조 9)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단성현감을 거쳐 호조좌랑·하동현감을 지낸 후 고성현감이 되었으며, 고성현감 재임 시 정사를 잘 돌보아 1587년(선조 20) 파격적으로 경흥부사가 되었다.
경흥부사 재임 중 여진족이 녹둔도를 침공하자 조산만호 이순신(李舜臣)[1545~1598]과 함께 이를 격퇴하였으나 피해가 많아 처벌을 받고 백의종군하였다. 1588년(선조 21) 다시 여진족이 침입하자 선봉에 서서 격퇴하였으며 그 공으로 김해부사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나주목사 재임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金千鎰)[1537~1593]을 도와 전공을 세웠고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1592년 7월 양대수(楊大樹)[?~1592]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제주목사 재임 중인 1593년(선조 26) 초병(抄兵) 300명을 뽑아 바다를 건너 선조를 호위하겠다는 장계(狀啓)를 올려 충신이라 칭송되었으며, 성곽에 외호(外濠)를 파고 성 위에는 토담집과 판잣집을 만들어 외환에 대비하였다.
또한 동성(東城)의 산저천(山底川) 위에는 제승정(制勝亭)을 건립하여 군민의 사기를 진작시켰으며, 명월진성(明月鎭城)을 개축하였고, 해안 포구에 보(堡)를 쌓아 전선(戰船)을 숨겨 둘 곳을 완비하였다.
1597년(선조 30) 부친상을 듣고서도 정유왜란이 일어나자 귀향조차 못하고 국토 방위에 전력을 쏟아 수산방호소(水山防護所)를 천연의 요새인 성산으로 옮겼다. 하지만 1599년 제주목사 성윤문(成允文)이 성산은 물이 없을 뿐 아니라 한 모퉁이로 치우쳐 있어 방어하는데 곤란하다 하여 다시 수산으로 방호소를 옮겼다.
1598년(선조 31) 겨울 성산 외성을 쌓다가 완성되기 직전에 풍토병으로 1599년 초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완풍부원군(完豊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