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439 |
---|---|
한자 | 吳興泰 |
영어음역 | O Heungta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찬흡 |
[정의]
조선 후기 제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선비.
[활동사항]
아버지는 오전(吳巓)이다. 집안이 가난하지만 배우기를 즐겼고,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1728], 정희량(鄭希亮)[?~1728], 박필현(朴弼顯 )[1680~1728] 등이 이른바 이인좌의 난을 일으키자 정의현을 중심으로 창의 격문을 삼읍(三邑)에 돌려 의병을 일으켰다가 진압 소식이 전해져 의병을 해산하였다.
유배인 권진응(權震應)[?~1775]이 창의 격문을 읽어 보고 “강강불요(剛强不撓)한 문장의 요지는 참으로 뜻이 격절(激切)하다.”고 평하였다. 1794년(정조 18) 심낙수(沈樂洙)[1739~1799]가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오흥태가 의병을 일으킨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정표(旌表)하였다.
[상훈과 추모]
1850년(철종 1) 봄에 제주목사 장인식(張寅植)이 오흥태의 향사(享祀)를 지내기 위하여 정의서당에 의사묘(義士廟)를 건립하였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의 속칭 곰배물 길가에 오흥태 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