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1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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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麟壽 |
영어음역 | Song Insu |
이칭/별칭 | 태수(台叟),미수(眉叟),규암(圭庵),문충(文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나영 |
[정의]
조선 중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태수(台叟) 및 미수(眉叟), 호는 규암(圭庵), 시호는 문충(文忠). 아버지는 건원릉 참봉 송세량(宋世良)[1473~1539]이다.
[활동사항]
1521년(중종 16) 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정자(正字)를 지내고 1523년(중종 18)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26년(중종 21) 홍문관수찬을 지내고 1534년(중종 29) 대간(臺諫) 때 김안로(金安老)[1481~1537]의 재집권을 막으려다가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병을 핑계를 대고 부임한 지 석 달 만에 사임하고 돌아왔는데, 이것이 다시 김안로의 미움을 사 사천(泗川)으로 유배되었다. 제주목사 재임 중 교화에 힘써 풍속을 바로 잡았으며, 교육을 진흥시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 등이 몰락하자 승정원승지에 임명되었고, 형조참판 재임 중인 1544년(중종 39)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관대사성이 되어 유생들에게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그 뒤 사헌부대사헌·이조참판을 역임하였으나 윤원형(尹元衡)[?~1565] 등의 미움을 사서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45년(인종 1) 을사사화로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서 파직되어 청주에 은거하다가 윤원형 등에 의해 사사(賜死)되었다. 1567년에(선조 즉위년) 신원되었다.
[저술과 작품]
저술에 시문집 『규암집(圭庵集)』이 있는데 4권 2책으로 된 활자본이다. 기묘사화 때 사망하였기 때문에 흩어져 있던 유고를 한말에 13대손 송태헌(宋台憲) 등이 수집하고 송병선(秉瑄)이 편집, 정리하여 1907년에 간행하였다,
[상훈과 추모]
선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제주의 귤림서원, 청주의 신항서원, 청원의 노봉서원, 대전의 숭현서원, 전주의 화산서원 등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