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1130 |
---|---|
한자 | 成允文 |
영어음역 | Seong Yunmun |
이칭/별칭 | 경무(景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찬흡 |
[정의]
조선 중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활동사항]
1591년(선조 24) 갑산부사로 부임하였고, 재임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당시 함경남도병마절도사 이영(李瑛)[?~1593]이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와 함께 왜적에게 잡혀가자 그 후임이 되었다. 함흥을 점령한 왜적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하여 황초령 전투를 지휘하였으나 여 큰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1594년(선조 27)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진주목사를 거쳐 정유재란 때는 경상도 해안의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1599년(선조 32) 3월 이경록(李慶祿)[1533~1599]의 후임으로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물이 없고 지형이 돌출되어 방어하기 어려운 성산진(城山鎭)을 수산(水山)으로 옮겼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제주성을 5척이나 높였으며 격대(擊坮)와 포대 21개소를 만들었다. 또한 조천관(朝天館)을 중수하고 쌍벽정(雙碧亭)을 연북정(戀北亭)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1601년(선조 34) 왜적에 대비하기 위하여 도민을 강제적으로 동원하여 성을 쌓고 건물을 짓자 도민의 원성이 컸을 뿐만 아니라 길운절(吉雲節)과 소덕유(蘇德裕)의 난까지 발생하였다.
1601년 6월에 경기도 수원부사로 전출되었다가 충청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604년(선조 37)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1607년(선조 40) 경상우도수군절도사 겸 통제사를 지냈다.
성격이 곧고 결백하였으나, 가는 곳마다 군민(軍民)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하여 원한을 샀기 때문에 사간원과 사헌부로부터 자주 탄핵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