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7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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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美軍政期-濟州 |
영어음역 | Migunjeonggiui Jeju |
영어의미역 | Jeju in 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허호준 |
[정의]
1945년 11월 11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행해진 미군정의 제주 통치.
[개설]
한국 현대사에서 미군정기는 미 육군 제24군단이 미국 태평양 방면 육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포고에 따라 1945년 9월 8일 ‘재조선 미국 육군 사령부 군정청’[미군정청]을 수립한 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까지 남한을 통치했던 시기를 의미한다.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존 하지(John R. Hodge) 중장 휘하의 제24군단이 맥아더의 명령에 의해 38도선 이남의 점령군으로 결정됐다. 제24군단은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자 미국 태평양 방면 육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9월 7일자 포고 제1호에 따라 ‘재조선 미국 육군 사령부 군정청’[미군정청]을 수립했다.
미군정은 해방 이후 사실상 정부 역할을 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틀을 형성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친일파의 등용과 각종 제도의 수립, 이데올로기의 문제 등 미군정기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미군의 제주 상륙]
미군의 제주도 최초 진주는 제24군단의 인천 상륙이 있은 지 꼭 20일이 지난 1945년 9월 28일이었다. 이날 오전 8시 미 보병 제7사단 무장 해제팀[팀장 파월 대령, 제24군단 군수참모]이 LSM 2척을 이용해 제주항에 도착했고, 1시간 뒤인 오전 9시에는 제24군단의 항복접수팀[팀장 그린 대령, 제184연대장]이 C47 수송기 2대를 이용해 제주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들은 철저하게 사전 계획을 수립한 뒤 일본군의 무장 해제에 착수했다.
이어 제59군정 중대가 11월 9일 제주도에 상륙했다. 제59군정 중대 사령부와 사령부 중대, 그리고 제주도를 위수 지역으로 관할하는 미 보병 제6사단 제20연대의 1개 중대가 같은 날 제주항에 상륙한 뒤 제주읍에 본부를 설치하고, 모슬포에 파견대를 보냈다.
이에 따라 제주도에 대한 미군정의 본격적인 점령 정책은 제6사단이 11월 11일 자정부터 일본군의 철수 작전을 책임졌던 제24군단 군수지원사령부(ASCOM)로부터 제주도에 대한 통제 업무를 넘겨받으면서 시작됐다.
[미군정과 제주도 인민 위원회]
써먼 스타우트(Thurman A. Stout) 소령을 사령관으로 한 제59군정 중대는 1945년 9월 17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편성되어 인천을 거쳐 제주도에 오기까지 한국에 대한 지식은 물론 제주도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었다.
제59군정 중대가 제주도에 진주한 것은 이미 제주도 인민 위원회가 ‘섬 내의 유일한 당이며, 목적과 내용을 지닌 유일한 정부’로서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군정은 제주도 인민 위원회를 공식적인 통치 기구로 인정하지 않았다.
군정 중대의 정책 또한 제24군단의 점령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제59군정 중대는 점령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도농회 주사 김문희를 도사 대리로 임명했으며, 일제하 경찰 출신인 신우균을 부감찰청장에 임명하는 등 통치 기구 조직에 착수하였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일제 식민지 지배 집단을 충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제주도 인민 위원회를 공식 기구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어도 제주도 민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인민 위원회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 미군정청에서 파견된 공보부 직원은 1946년 12월 현재 경찰과 미군, 제주도민 모두를 포함해 제주도에는 어떠한 충돌이나 폭동이 전혀 없다고 보고할 정도로 미군정과 인민 위원회 간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유지됐다.
초기 미군정과 제주도 인민 위원회가 협조 체제를 이루게 된 이유는 3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군정 중대가 진주하기 전부터 이미 제주 지역의 인민 위원회가 활발한 활동을 벌이면서 제주도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전라남도 미군정 요원이었던 미드(Grant Meade)는 ‘제주도 인민 위원회가 상당할 정도의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최대의 효율성을 가지고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둘째, 군정 중대는 인민 위원회의 정책적 온건성 때문에 인민 위원회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미드는 제주도가 전라남도에 종속돼 있어 군정 중대로서는 정치적 어려움이 없는 반면 인민 위원회가 매우 협조적으로 활동함에 따라 군정 중대는 인민 위원회를 최대한 지원했다고 평가하였다.
셋째, 지역적 고립성으로 인해 상급 부대인 전남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제101군정단과 연락이 원활하지 않았던 점도 군정 중대가 어느 정도 독자성을 가지고 인민 위원회와 협력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였다. 당시 제101군정단 산하였던 제59군정 중대는 1945년 12월까지 전남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제101군정단과 접촉을 거의 하지 못했다.
[사회·경제적 상황]
해방 직후 제주도가 직면했던 문제는 급격한 도민 인구의 증가였다. 인구의 급증은 미군정기 제주도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각종 자료를 통해 1944년과 1946년의 인구 변동을 비교하면, 21만 9,500여 명에서 27만 6,100여 명으로 5만 6,600여 명의 인구가 제주도에 유입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구의 양적 팽창은 정치적인 측면은 물론 경제적 측면에서도 제주 지역을 압박하는 요인이 됐다.
존 메릴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에 외부로 나갔던 사람들이 귀환하고 제주도에 남아 있던 5만여 명의 일본인들이 1945년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빠져나가고 군사 기지가 철수함으로써 일본군들에 대한 본국의 송금이 끊기고 소련의 점령 지역으로부터 공급되어온 비료와 기타 공업 생산품이 중단됨으로써 제주의 경제 사정은 혼란에 빠져 들어갔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일본에 진출했던 제주 출신 노동자들이 제주도의 가족들에게 보내던 송금도 끊겼다. 이러한 사태는 귀환자들은 물론 이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던 제주도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며, 더 나아가 제주 지역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해방 전인 1944년 6월 현재 72곳에 이르던 제주 지역의 공장 가운데 1946년 11월 현재 가동 중인 공장은 32곳에 불과해 감소율은 55.6%로 전국 최고치를 기록했다. 제주 지역에서 가장 큰 제조업체였던 제주 주정 공장의 가동 상태를 보면, 해방 전 한때 매달 1000드럼의 주정을 생산했지만 1946년 하반기에는 한달 240드럼을 생산하는 데 그쳤다. 1946년 말 제주도에 특파됐던 한 기자는 당시 심각했던 제주 지역 경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제주도 인민 30만은 지금 역경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모든 공장은 대부분이 움직이지 않고 친일파 민족 반역자들이 발호하여 이 땅의 민주화를 방해하고 있다. ‘미군정이 존속하는 한 경찰은 나를 체포치 못할 것이다’ 이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쌀과 자유를 달라! 이것이 정의의 인민의 부르짖음이 아닐까?
이 땅의 특수한 공장 시설을 본다면, 작년 6월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일부 파괴당한 무수알코올공장, 조선에서 유일한 통조림을 만드는 공장, 전분 공장, 조선의 수요량을 초과 생산하는 옥도정기 공장, 자개단추 공장 등이 있으나 무수알코올 공장이 지난 11월 해방 후 처음으로 작업을 시작하였을 뿐이고 나머지 제 공장은 좋은 계획은 있으나 기술 부족, 원료난으로 아직까지도 공장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경제가 악화 일로를 치닫자 제주도민들은 미 구축함의 해상 경계에도 불구하고 소형 선박을 이용해 목숨을 내놓고 제주와 일본을 오가며 밀무역을 하거나 사람들을 실어 나르다 적발되기도 했으며, 조난 사고를 당해 희생되기도 하였다.
제주도의 보리 수확량은 1946년 8만 3,785석으로 해방 이전인 1943년의 20만 4,796석, 1944년의 26만 8,133석에 비해 각각 41%, 31%에 지나지 않았다. 제주도의 식량난이 계속된 것은 전국적인 대흉년으로 다른 지방에서 쌀을 도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미군정 미곡 정책의 실패에 기인하고 있었고, 미군정은 문제 해결을 위해 일제가 실시했던 쌀 공출 제도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콜레라와 대흉년 등으로 가중된 식량난과 공출 반대 운동으로 1947년 제주 지역의 곡물 수집량은 전국에서 최하위를 기록했다.
제주도민들이 1947년 한 해 동안 배급받은 식량은 규정대로라면 1인당 하루 3홉이어야 하는 데도 2홉 5작이 최대였다. 그것도 매달 초에 배급받는 것이 아니라 하순에야 그 달의 상반기분을 배급받는 식이었기 때문에 제주도민들은 기아 상태에 허덕여야 했다.
이마저도 질이 나빠 주민들이 구토를 하는 사례도 있었다. 배급된 식량 가운데 소맥분은 질이 좋지 않은 데다, 비료나 석유, 석탄분 등이 섞여 있어 이를 식량으로 먹은 주민들이 구토를 하는 증세까지 보여 배급을 중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귀환자의 증가, 제조업체의 가동 중단, 해방으로 인한 갑작스런 대외 교역의 중단, 미군정의 미곡 정책의 실패와 식량난 등으로 빈사 상태에 들어간 제주 지역의 경제 상황은 호전의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제주도민들을 심리적 공황 상태로 몰아넣었다.
[정치적 상황]
미군정과 제주도민의 본격적 충돌은 1947년 3월 1일의 제28주년 3·1절 제주도 기념 대회 때 시작되었다. 제주읍과 애월면, 조천면 주민 등 3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주 북 국민학교에서 기념 대회가 열려 평화 시위를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초등학생부터 주부에 이르기까지 6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미군정의 시위대 해산 지원과 경찰의 증원으로 3·1절 기념 대회 소요는 가라앉았으나 제주도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더욱이 경찰이 사태의 진상을 밝히기는커녕 시위 참가자들을 무차별 연행하는 등 3·1절 발포 사건에 대한 군정 당국과 경찰의 납득할 만한 조치가 없자 분노한 제주도민들이 남한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민관(民官) 총파업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미군 방첩대[CIC]는 제주도의 총파업이 남한 전역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는 시금석일지 모른다고 평가하였다. 미군 정보 보고서에서는 제주도의 총파업에 대해 “좌익의 남한에 대한 조직적인 전술임이 드러났다”고 기록하고 있는가 하면,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 단체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 거점으로 알려졌다는 등 제주도를 좌익 근거지로 간주했다.
3·1절 사건과 총파업, 이어진 제주도민 대량 검거 사태로 제주 사회의 불안감이 증폭되는 가운데 1947년 4월 10일에는 한독당 농림부장 출신의 유해진을 제주도지사로 임명했다. 미군 방첩대까지 극우파 인물로 분류한 유해진은 부임하기 직전 “극좌와 극우를 배제해 행정을 추진하겠다”고 언급한 것과는 달리 제주도에서 극단적인 우익 강화 및 좌익 탄압 정책을 폈다.
그의 우익 강화 정책으로 제주 지역의 정치·사회·경제적 긴장감이 높아가자, 미군정은 유해진 도지사에 대해 특별 감찰을 실시했고, 특별 감찰관 로렌스 넬슨 중령은 1948년 3월 11일 군정장관 딘 소장에게 유해진 도지사의 경질과 제주도 경찰에 대한 경무부의 조사 등 4개의 건의 사항을 제출했다.
그러나 딘 소장은 제주도 경찰에 대한 경무부의 조사 등 3개의 건의 사항을 받아들였으나 유해진 도지사 경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한 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정치적 이유로 억압 정책을 쓰지 않도록 도지사·경찰청장 회의에서 지시한 가운데 딘 소장은 극단적 우익 강화 정책으로 현지 미군정과 제주도민들의 지탄을 받고 있던 유해진 지사를 유임시켰다.
넬슨 중령이 딘 소장에게 특별 감찰 보고서를 제출한 시점은 이미 5·10 선거 실시가 결정된 뒤로 총력적인 선거 준비 작업에 들어간 상태였다. 선거의 성공적인 실시에 초미의 관심을 갖고 있던 군정 수뇌부로서는 제주도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는 정치적 긴장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데도 유해진 도지사의 우익 강화 정책이 오히려 선거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분석된다.
그 뒤, 미군정은 제주도에서의 5·10 선거를 성공시키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경주했다. 미군정은 제주 4·3 사건의 진압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개입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한국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도 제주도 문제의 해결 방안을 건의하는 등 계속 제주도를 주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