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7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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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榮後 |
영어음역 | Mun Yeongh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나영 |
성격 | 문신|제주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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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 |
성별 | 남 |
생년 | 1629년(인조 7) |
몰년 | 1684년(숙종 10) |
본관 | 남평 |
대표관직 | 곡성현감|제주향교 교수 |
[정의]
조선 중기 제주향교 교수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남평. 자는 인경(仁卿)이다. 아버지는 문재박(文在樸)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1664년(현종 5) 8월에 조정에서 정언 윤심(尹深)을 제주시재어사로 보내어 하급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인 시취(試取)를 실시하였을 때 문과에 문영후·문징후(文徵後)[1632~?]·고홍진(高弘進)[1602~1682] 등 3명을, 무과에는 문창업(文昌業) 등 4명을 합격시켰다.
합격자에게는 문과의 초시와 복시를 치루지 않고 바로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이른바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주었다. 문징후는 문영후의 종제(從弟)이다. 1666년(현종 7) 식년시 문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전라도 남원의 오수찰방과 곡성현감을 지냈다.
1675년(숙종 1) 8월 곡성현감 재임 때 어떤 여성과의 불륜 관계 때문에 전라감사의 장계에 의해 조정에서 심문을 받고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도민의 생활을 걱정하고 많이 돌보았다.
1681년(숙종 7) 좌수 오상현(吳尙賢)과 함께 도민의 부역이 공정하지 못하고, 또한 이름 없는 세금이 많아 백성들이 괴로워한다는 것을 진언하니 제주목사 임홍망(任弘望)[1635~1715]은 상정법을 제정하여 줄 것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에 그는 이러한 부역의 균등 배분에 대한 업무를 담당하여 무명지세를 혁파하니 백성들의 삶이 편해졌다. 1684년(숙종 10) 제주향교의 교수로 임명되었는데 구례도목(舊例都目)에 의하면 서열로는 교수가 판관보다 상위 직급이므로 간혹 서열을 다투는 경우가 있었다.
문영후는 교수로서 공식 석상에서 판관 아래에 앉고 그 밑으로 정의현과 대정현 현감의 윗자리에 앉으니 자리 다투는 일이 없었으며, 이때의 사람들이 그를 체통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여 우러러보았다.
[학문과 사상]
시문과 글씨에 능하고 천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복서(卜筮)를 잘하며 미래의 일을 예언, 적중시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래서 풍채가 뛰어난 양유성(梁有成)[1684~1761], 풍수지리에 밝은 고홍진(高弘進), 의술로 유명한 진국태(秦國泰)[1680~1745], 복서(卜筮)로 알려진 문영후를 탐라사절(耽羅四絶)이라고 불렀다.
[묘소]
묘소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