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4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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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晉鎔 |
영어음역 | Kim Jinyong |
이칭/별칭 | 진숙(晋叔),명도암(明道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성격 | 문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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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 |
성별 | 남 |
생년 | 1605년(선조 38) |
몰년 | 1663년(현종 4) |
본관 | 광산(光山) |
[정의]
조선 중기 제주 출신의 문인.
[가계]
본관은 광산. 자는 진숙(晋叔), 호는 명도암(明道菴). 아버지는 김경봉(金景鳳)이며, 구좌읍 한동리 태어나 처가인 봉개리의 명도암으로 옮겨 살았다.
[활동사항]
제주에 유배 온 실학자 이익(李瀷)[1579~1624]에게 수학하였다. 1635년(인조 13) 진사시에 합격하여 1643년(인조 21) 숙녕전참봉에 천거되었으나 고향에서 후생을 가르치기로 결심하여 이를 사양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679년(효종 10년)에 김진용의 건의로 당시 제주목사 이회(李禬)[1607~1666]가 교육을 진흥하기 위하여 고득종(高得宗)[1388~1460]의 옛 집터(현 오현단)에 장수당(藏修堂)을 건립하였다.
장수당은 12칸으로, 35명의 학생이 수학하였으며, 김진용은 장수당에 은거하면서 삼읍(三邑: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학생들을 훈학하는 데 힘썼다.
그로 인해 제주의 유학이 왕성해지고, 풍속이나 교화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후인들은 김진용이 살았던 곳의 이름을 빌어 명도암이라 칭하였다.
[상훈과 추모]
1831년(순조 31) 유림의 건의로 영혜사(永惠祠)에 제향되었다. 또한 1849년(헌종 15) 장인식(張寅植)·고득종의 봉향처인 향현사(鄕賢祠)에 김진용이 이안(移安)되어 추가로 제향되었으나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이 추향 제도가 없어졌다.
1965년 10월 명도암 선생 탄신 6회갑 기념으로 명도암 김진용 선생 유허비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봉개동 명도암오름 산기슭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