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4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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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允植 |
영어음역 | Kim Yunsik |
이칭/별칭 | 순경(洵卿),운양(雲養)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나영 |
[정의]
조선 말기 제주에 유배된 문신.
[개설]
생전에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개혁, 아관파천 등의 사건들을 겪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흥사단이 전개한 민족운동과 대동학회(大東學會)·기호학회(畿湖學會)에 참여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조인에 가담하여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부대신을 지낸 이용직(李容稙)[1852~1932]과 연서로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에게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를 보냈는데, 이 사건으로 일본 헌병대에 피검되어 옥고를 치르고 작위도 박탈당하였다.
[가계]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순경(洵卿), 호는 운양(雲養). 경기도 광주시 귀천(歸川)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익태(金益泰)이며,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실학사상의 선구자인 김육(金堉)[1580~1658]의 9세손이다. 1922년 1월 22일 서울시 종로구 봉익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유신환(兪莘煥)[1801~1859]과 박규수(朴珪壽)[1807~1877]에게 배워 학문이 깊었으며, 1874년(고종 11)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95년(고종 33) 외무아문대신에 임명되었으며, 갑오개혁의 입안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외무아문대신에서 해임되었으며, 1897년(고종 34) 12월 종신 유형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는데, 폐후위조(廢后僞詔)를 각국 공관에 통보하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제주도 유배 명령을 받았을 때 규장원경 이승오(李承五)[1837~?]도 함께 제주도에 유배되었는데 명성황후가 시해되었을 때 폐후고묘문(廢后告廟文)을 제술하였기 때문이다.
김윤식과 이승오가 제주에 유배되어 감옥에 갇힌 사실이 알려지자 제주의 인사들이 매일같이 찾아와 문안하며 위로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나인영(羅寅永) 등 김윤식을 따라온 사람과 한선회·김은찬 등 제주에 귀양 와 있는 사람 및 김응빈(金膺斌)[1846~1928]·최창순·장규열·송두옥(宋斗玉)[1850~1922]·이긍식·홍종시·김희갑·김희정·채구석(蔡龜錫)[1850~1920]·채정진·김응전·김응해·정현규·황병욱 등 제주도의 선비들이 있었다.
김윤식과 이승오는 40일이나 옥고를 치르고 1897년 2월 20일 보석으로 풀려났다. 김윤식은 제주성내 교동 김응빈의 집에 머물면서 『속음청사(續陰晴史)』를 술회하였다. 제주목사 이병휘(李秉輝)[1851~?]가 화전세(火田稅)의 혁파를 주장하면서 민란을 일으킨 방성칠(方星七)[1849~1898] 난의 책임을 물어 파면되자 후임으로 박용원(朴用元)이 1897년 4월 5일 부임하였다.
박용원은 자신이 과거 제주에 유배되어 1년 동안 귀양살이를 한 경험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김윤식을 상사로 모신 적도 있었으므로 그를 비롯한 여러 유배인들을 극진히 대우하였다.
1897년 4월 22일 김윤식은 유배소인 김응빈 집에서 서화를 즐기는 문인과 함께 시회를 열었고, 이 시회를 계기로 김윤식을 중심으로 한 유배인과 제주 문인이 한데 어울려 귤원시회(橘園詩會)를 조직하였는데, 회원은 유배인 7명과 도내 체류학자 5명, 도내 문인 11명 등 모두 23명이었다.
1901년(고종 38) 5월 초에 일어난 1901년 제주민란으로 7월 10일 김윤식은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 지도(智島)로 이배되었으며, 정부의 70세 이상자에 대한 석방조처에 따라 1907년(순종 1) 풀려났다.
귤원시회(橘園詩會)을 통해 제주성 내외의 문화 유적을 두루 돌아다녔으며, 유배인과 지방 문인의 시회 활동으로 제주도의 한문학 발달을 크게 촉진하였고, 중앙과 지방의 문화 교류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에는 『운양집(雲養集)』, 『천진담초(天津談草)』, 『음청사(陰晴史)』, 『속음청사(續陰晴史)』 등이 있는데, 『속음청사』는 당시 제주 지역의 정치·경제·산업·문화·사회 등 각 분야에 걸친 귀중한 연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상훈과 추모]
1908년 훈일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