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3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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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汝水 |
영어음역 | Kim Yeosu |
이칭/별칭 | 수재(水哉),해성군(海城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찬흡 |
[정의]
조선 중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수재(水哉). 할아버지는 김극도(金克桃), 아버지는 병마절도사 김완(金完)이며,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1624년(인조 2)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주부(主簿)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감찰로 옮겨졌다. 1627년(인조 5) 청나라 3만 군대를 강홍립(姜弘立)[1560~1627]과 함께 맞서 싸우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1635년(인조 13) 부친상을 당하여 거상(居喪) 중이였으나 병자호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전라도관찰사 이시방(李時昉)[1594~1660]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후 함경도 경흥부사 재임 중에 농업과 양잠업을 권장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퇴임 후 군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1647년(인조 25) 5월 유정익(柳廷益)의 후임으로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1649년(인조 27) 9월까지 재임하였다. 제주목사 재임 중 홍화각(弘化閣)과 영청(影靑)을 중수하였으며 왜적에 대비하기 위하여 원래 사병 2초(哨: 200명)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1647년 1초(哨: 100명)를 증원시켜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또한 군사 중 재능이 있는 자 200여 명을 선발하여 아병(牙兵)과 별초(別抄)로 편성하여 불의의 사변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효종실록』에는 “김여수는 탐욕스럽고 무도한 자인데,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공장(工匠)을 침학하고 군민(軍民)의 재물을 갈취하였습니다. 영암(靈岩)에 있는 그의 집에는 재물을 운반하는 배들이 줄을 잇고 말이 무리를 이루고 있으므로, 도민들이 양호(梁琥: 공직에 있으면서 나라의 재물을 갈취하는 사람)에 비유하기까지 합니다. 제주목사에서 물러나게 하고 잡아다 문초하여 죄를 정하소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여시는 1650년(효종 1) 유배되었다가 풀려났으며 1653년(효종 4) 오위장(五衛將)에 임명되었다.
[상훈과 추모]
해성군(海城君)에 봉해졌고,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