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357 |
---|---|
한자 | 金萬希 |
영어음역 | Kim Manhui |
이칭/별칭 | 김경흥(金景興),여운(汝雲),척재(惕齋),월포(月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나영 |
[정의]
조선 전기 제주로 유배된 문신.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여운(汝雲), 호는 척재(惕齋) 혹은 월포(月浦). 일명 김경흥(金景興)이라고도 한다.
[활동사항]
고려 충정왕 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도첨의사사헌납을 지냈으며, 공민왕 때 밀직사대언이 되었고, 자제위(子弟衛)에서 일하였다. 신돈(辛旽)[?~1371]이 조정에 들어오자 이존오(李存吾)[1341~1371]가 1366년(공민왕 15) 신돈 배척 상소를 올릴 때 함께 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후 신돈이 제거되자 복직되어 찬성사를 역임하고 삼중대광 도첨의좌정승까지 올랐으나 정국이 혼란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낙향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1392년(태조 1) 조선 태조가 등극하여 고려 유신을 위무할 때 강직한 그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하며 절의를 지켰다. 신정권을 끝까지 반대하자 제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처음 애월읍 애월포로 들어와 곽지악 산자락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냈으며,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죄가 크므로 밝고 밝은 하늘을 거울삼아 빌 뿐이다.”라는 뜻에서 이름마저 만희(萬希)로 고치고 이 지방 자제를 가르쳤다.
[저술과 작품]
유배 당시의 심정을 기록한 『양해원사록(讓海原辭錄)』이 있다. 유배를 갈 때 바다를 건너며 ‘唐虞遠兮(당우원혜) 嗟余焉歸(차여언귀)인고 願從夷齊兮(원종이제혜)여 薄言採薇(박언채미)인가’라는 도해시(蹈海詩)를 지었으며, 섬 가까이 이르러 한라산의 웅장한 모습을 보고 ‘拏山何以古西山(나산하이고서산) 海變桑田人已矣(해변상전인이의) 孤竹淸風遠莫攀(고죽청풍원막반) 出門欲往小瀛寰(출문욕왕소영환)’이라고 읊어 고려의 충신임을 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