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315 |
---|---|
한자 | 奇虔 |
영어음역 | Gi Geon |
이칭/별칭 | 청파(靑坡),정무(貞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찬흡 |
[정의]
조선 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행주(幸州). 호는 청파(靑坡), 시호는 정무(貞武). 고려 공민왕 때의 난신(亂臣) 기현(奇顯)의 후손이다.
[활동사항]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지만 학행이 높아 1442년(세종 24) 포의(布衣)로 발탁되어 정5품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1443년(세종 25) 12월에 신처강(辛處康)의 후임으로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1445년 12월 첨지중추(僉知中樞)로 전출될 때까지 선정을 베풀었으며, 불필요한 지방 관제를 없애고 해양 방어 체제를 개편하였다.
부모가 죽으면 구멍이나 언덕에 버리는 풍속을 교화시켜 예절을 갖추어 장사지내도록 하는 등 의례 제도를 제주에 확립시켰다. 뿐만 아니라 나병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을 지어 환자 100여 명을 수용하여 고삼원(苦蔘元)을 복용시키고 바닷물로 목욕시키자 거의 치료되었다.
한편 제주목사 재임 중 도민이 전복 따는 것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전복을 먹지 않았으며, 황해도 연안군수 재임 중에는 군민이 진상하는 붕어잡이의 고충을 생각하여 붕어를 한번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1448년(세종 30)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에 부임하여 역시 선정을 베풀었고, 1449년(세종 31) 호조참판으로 승진하였으며, 세종이 죽자 고부사(告訃使)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개성부유수를 지냈고, 1453년(단종 1) 대사헌이 되었으며, 인순부윤과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당시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였는데, 세조가 다섯 차례나 불렀지만 사양하고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묘소]
묘소와 신도비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에 있으며, 1986년 고양시 향토유적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1697년(숙종 23)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에 있었던 추산서원(秋山書院)에 위패가 모셔졌다. 추산서원은 1697년(숙종 23) 장성 지역 유림이 기씨 문중의 기건·기효간(奇孝諫)[1530~1593]·기정익(奇挺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그 뒤 기준(奇遵)과 조찬한(趙讚韓)[1572-1631]을 추가 제향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