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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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得宗 |
영어음역 | Go Deukjong |
이칭/별칭 | 자부(子傅),영곡(靈谷),문충(文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나영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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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
성별 | 남 |
생년 | 1388년(우왕 14) |
몰년 | 1460년(세조 6) |
본관 | 제주(濟州) |
대표관직 | 대호군(大護軍)|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첨지중추원사|한성부판윤|호조참의 |
[정의]
조선 전기 제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자부(子傅), 호는 영곡(靈谷), 시호는 문충(文忠). 아버지는 상호군 고봉지(高鳳智)[?~1411]이며, 조천읍 교래리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1413년(태종 13) 효행이 두터워서 직장(直長)에 천거되었으며, 1414년(태종 14) 알성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대호군(大護軍),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 등을 지냈다.
1427년(세종 9) 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437년(세종 19) 첨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38년(세종 20) 호조참의 재임 중 종마(種馬) 진공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439년(세종 21) 통신사로 일본왕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돌아온 후 예조참의, 중추원동지사, 한성부판윤 등을 지냈다.
세종 때 중앙 정부가 제주도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해 나가는 상황에서 고득종은 재경 관인으로서 어느 정도 기여하였고, 이는 여러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가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고득종이 제주민을 위한 시책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① 제주의 토지 등급을 내려주도록 요청하여 제주인들의 조세 부담을 덜어 주었다. ② 한라산 기슭 4면에 목장을 축조하여 소위 제주도 목장이 10소장으로 나뉘게 되는 시초를 열었다. ③ 참역(站驛) 폐단의 시정하였다. ④ 서울로 올라가 종사하는 제주 출신 자제를 위하여 직료(職料)를 설치하여 그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문장과 필법이 매우 뛰어났다. 특히 제주목 건물의 하나인 홍화각 현판글씨와 「홍화각기(弘化閣記)」는 1435년(세종 17)에 지은 유명한 문장이며, 그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친필 「몽유도원도찬양칠언장편시(夢遊桃園圖讚揚七言長篇詩)」는 글씨가 예스럽고 아담하며 현재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460년(세조 6)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추증되었다. 제주인들로부터 효행이 칭송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주도에 여러 가지 좋은 시책을 행한 데 감동을 받아 제주민들은 그를 부형으로 섬겼다고 한다. 제주목사 이원조(李源祚)[1792~1872]는 제주인들의 건의로 1843년(헌종 9) 영혜사(永惠祠) 동쪽에 향현사(鄕賢祠)를 세우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사후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