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14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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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戰爭 |
영어공식명칭 | 6·25 War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현수 |
[정의]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북한의 남침으로 전라북도 익산 지역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6·25 전쟁의 과정에서 익산 지역은 630여 명의 참전유공자를 배출하였고, 대한민국 해병대 최초의 전투이자 승전지 중 하나로서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하지만 미군에 의한 이리역 오폭사건처럼 수많은 민간인 희생의 아픔도 겪어야 했다. 휴전 이후 익산시는 다양한 분야에서 6·25 전쟁을 기억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매해 6·25 기념행사를 열고, 참전유공자와 전사자 유족 발굴에 노력을 다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무조건 항복에 따라, 세계2차대전이 막을 내리고 식민통치 상태였던 한반도는 군사적 상황에 따라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경계로 주둔하였는데 38선 이북은 소련이, 38선 이남은 미국이 각각 분할 점령하였다. 이후 미국, 영국, 소련은 모스크바 회동을 통해 한반도를 5년 간 신탁통치할 것을 결의하였는데, 한반도에선 처음에는 맹렬한 반탁운동이 일어났으나, 소련의 지령을 받은 좌파세력이 찬탁으로 입장을 바꾸면서 한민족 사이에서도 혼란이 발생하였다.
이후 1947년 11월에 열린 유엔총회에서는 유엔 임시한국위원단의 구성과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되었으나,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1948년 초 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하였고, 결국 1948년 5월 선거를 통해 8월 15일 남한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9월 북한에서는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통한 김일성 중심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공식적인 분단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후, 북한은 소련의 계획 하에 계획적인 군사력 증강을 시도하여, 13만 명의 북한군 10개 사단이 38선에 배치되었으며, 남한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군사력을 갖춘 북한은 1949년 말 김일성의 스탈린 방문을 통한 남한 무력침공 승인을, 1950년 4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를 통한 무력통일안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에 의한 불법 남침인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결과]
6·25 참전유공자 공적탑에 따르면 익산 출신의 6·25 참전 유공자는 630여 명에 달한다.익산 출신의 참전유공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강희중 일등상사이다. 강희중 일등상사는 국가보훈처에서 2014년 8월에 선정한 ‘6·25 전쟁 영웅’이다. 강희중 일등상사는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출신으로 1947년에 조선경비대에 입대했으며, 18연대 1대대 1중대 1소대 선임하사로 안강-기계전투에 참전하였다. 1950년 8월 5일, 북한군은 낙동강 일대의 모든 전선에 걸쳐 일제 공격을 감행했는데, 이로 인해 9일에는 경상북도 포항시 기계면이 북한군에 점령당하게 된다. 이에 국군은 기계 일대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을 펼쳤고, 기계와 안강, 포항과 경주 북부에서 국군 1군단 예하 수도사단과 북한군 12사단이 격전을 벌리며 남진을 막아낸 전투가 안강-기계전투이다.
강희중 일등상사는 8월 18일 점령당한 기계 일대를 탈환하는 전투에서 활약하였으며, 함께 참전한 1중대와 함께 1,245명의 적을 사살하고, 17명의 포로를 잡았으며,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등 북한군의 부산 방면 진출을 저지하는 공을 세웠다. 하지만 9월 3일에 발발한 2차 안강-기계전투에서 안타깝게 사망하였다. 1950년 12월 30일에 화랑무공훈장을 추서받고 일등상사로 일계급 특진하였다.
익산 지역에서 발생한 전투 중에서는 장항-군산-이리 지구전투가 잘 알려져있다. 이 전투는 6·25 전쟁 당시 국군 해병대가 거둔 최초의 전투이자, 최초의 승전이었다. 6·25 전쟁 당시 제주도에 주둔하던 해병대는 고길훈 소령을 부대장을 맡아 해병 1기, 2기생으로 구성된 대대규모의 부대였다. 제1호 작전명령을 하달받은 해병대는 당시 호남지역을 방어하면서 군산항에 야적되어있던 정부미를 가져오는 것이 임무였다. 명령을 받은 해병대는 7월 15일부터 20일까지 교전하여 356명의 적을 사살하고, 5명의 포로를 잡는 한편, 68명의 전사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북한군 13연대의 호남지역 진출을 저지하는 한편, 호남지역의 주요물자를 안전하게 반출할 수 있었다.
한편 이리역 오폭사건과 같은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다. 1950년 7월 11일 미군 소속 폭격기 B-29 2기가 당시 철인동에 위치했던 이리역과 평화동 변전소 및 만경강 철교에 폭탄을 투하한 것이다. 미군은 본 사건에 대해 이리역을 수원역으로 오인한 바람에 발생한 오폭사건으로 해명을 했지만, 그로 인해 이리역 철도 직원과, 승객 인근 주민 등 수백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한 것. 이후 2010년 6월 29일에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본 사건에 대해서 미군의 전투가가 오폭을 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현재 익산역에는 ‘1950년미군의이리폭격희생자위령비’가 세워져 당시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다.
[전쟁 치유를 위한 익산의 노력]
6·25 전쟁 발발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익산에서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들이 진행돼왔다.
1951년 원불교에서 설립한 익산보화원(益山普和院)은 6·25 전쟁으로 생겨난 수많은 고아들을 수용하기 위한 고아 보호시설로, 현재의 원광대학교 음악대학 위치에 설립되었다. 1965년 이리보육원으로 통합되었다.
2002년 익산시립합창단은 6·25 전쟁 52주년을 맞아, ‘6·25 전쟁 회상음악회’를 연주하였다. 이 공연은 1994년 이요한 씨가 만든 곡에, 북한 시인 오영재 씨의 시 구절로 가사를 쓴 ‘코리아 레퀴엠’을 소재로 하였다.
2003년 소설가 윤흥길은 익산 소라산을 배경으로 한 소설 『소라단 가는 길』을 출간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6·25 전쟁과 6·25 전쟁 이후 고아가 된 소년의 이야기를 통해 6·25 전쟁의 비극을 아이들의 관점으로 묘사하고 있다.
2004년에는 익산시 팔봉동 공설묘지 입구에 ‘6·25 참전유공자 공적탑’이 높이 4m, 넓이 3㎡의 규모로 세워졌다. 이 공적탑은 6·25 전쟁과 같은 민족적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지구의 항구적 평화를 기원하여 주탑 상단에 지구본의 형상을, 지구본 아래에는 국군의 모습을 담았다.
2017년에는 이리공업고등학교에서 ‘6·25 참전용사 모교 명패 증정식’이 열렸다. 전북서부보훈지청과 육군 제35사단이 함께한 이 행사를 통해 이리공업고등학교는 익산 최초 6·25 참전용사 명패를 수여받았으며, 명패에는 6·25 전쟁 당시 활약한 학생 42명의 명단이 기재되어있다.
한편 2020년 현재 익산시는 지난 20년에 걸쳐 전사자 유가족 유전자 검사 지원사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참전용사의 유해 확인과 참전유공자 발굴에 힘 쓰고 있다. 이와 같은 성과로 2018년에는 故 최양섭 일병, 2020년에도 참전유공자 1명에게 화랑무공훈장이 전수되었다.
[의의와 평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발발한 6·25 전쟁은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에 이르기까지 3년 1개월이라는 시간동안, 한반도에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민족상잔의 전쟁이었던 6·25 전쟁을 통해 남과 북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씻을 수 없는 아픔과 갈등이 지속되고 있으며, 한국의 경우 약 450만명의 인명 피해와 더불어 산업시설 43%, 주택시설 33%가 파괴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국제적 냉전체제의 결과물이라고도 볼 수 있는 6·25 전쟁은 현재까지도 휴전 중인 상태로 지속되고 있으며 여전히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서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