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1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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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通訓大夫行益山郡守郭公墓碣銘 |
영어공식명칭 | Tonghundaebu Haeng Iksangunsu Gwakgong Myogalmyeo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세인 |
[정의]
조선 후기에 익산군수를 역임한 곽세건을 기리기 위하여 개항기 유학자 조긍섭이 쓴 묘갈명.
[개설]
「통훈대부 행 익산군수 곽공 묘갈명」은 영남 지역의 대표적 근대 유학자인 조긍섭(曺兢燮)[1873~1933]이 쓴 곽세건(郭世楗)[1618~1686]의 묘갈명이다. 곽세건의 자는 공가(公可), 호는 무위자(无爲子)이며, 허목(許穆)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곽세건은 형조좌랑·공조정랑 등을 역임한 뒤, 1677년(숙종 3)에 전라북도 익산군수로 내려왔다. 군수 재임 시에 선정을 베풀어 군민들의 칭송이 높았다.
묘갈명을 지은 조긍섭의 자는 중근(仲謹)이고, 호는 심재(深齋)·암서생(巖棲生)·중연당(中衍堂) 등이다, 20대 때 이미 주변 학자들이 학문에 대하여 물으러 올 만큼 도학(道學에 조예가 깊어서, 이후 영남 사림(士林)의 거목으로 자리 잡았다. 조긍섭은 1919년 3월에 「일본 총독과 동포 대중에게 보내는 글」을 초안하다가 발각되어 17일간 구속된 적도 있으나, 정치적·사회적 참여보다는 향촌에 머물며 저술과 강학으로 평생을 보냈다. 묘갈명은 곽세건의 7세손인 곽의연(郭懿淵)의 의뢰를 받아 조긍섭이 1923년에 지은 것이다.
[구성]
「통훈대부 행 익산군수 곽공 묘갈명」은 조긍섭의 문집인 『암서집(巖棲集)』 30권 ‘묘갈명(墓碣銘)’에 수록되어 있다. 곽세건의 주요 행적에 대한 조긍섭의 논평으로 이루어진 서문을 앞부분에 배치하고, 서문에 이어 곽세건의 올곧은 삶을 예찬하는 4언 16구 형식의 명(銘)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내용]
서문은 현종(顯宗)[1641~1674]과 숙종(肅宗)[1661~1720] 대의 남인(南人)과 서인(西人) 간의 예송(禮訟) 논쟁과 정치적 대립, 남인의 입장을 강하게 대변하는 곽세건의 정치적 행보 등을 주요한 내용으로 삼고 있다. 특히 1674년 현종 승하 후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현종 지문(誌文) 제작에 반대하는 곽세건의 상소가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또한 상소 진상 이후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를 시작으로 익산군수까지 이르게 된 출사,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에 연루되어 옥사를 치른 후 사망하기까지의 행적이 이어진다. 서문의 중간 부분은 당론의 폐해와 곽세건의 강인하고 의로운 인품에 대하여 조긍섭이 논평한 내용이다. 마지막 부분은 곽세건의 가계를 간략히 기술하고 있다. 사언시(四言詩)로 이루어진 명문에서는 한나라 주운(朱雲)의 전고를 활용하여 바르게 간하는 곽세건의 행적을 칭송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익산군수를 역임한 곽세건의 예송 논쟁과 관련한 주요 이력을 통하여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17세기 남인과 서인 간의 예학적 입장과 정치적 동향을 살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