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592 |
---|---|
한자 | 月軒集 |
영어공식명칭 | Wolheonjip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봉곤 |
편찬 시기/일시 | 1542년 - 『월헌집』 초간본 편찬 |
---|---|
간행 시기/일시 | 1542년 - 『월헌집』 초간본 간행 |
편찬 시기/일시 | 1702년 - 『월헌집』 재간본 편찬 |
간행 시기/일시 | 1702년 - 『월헌집』 재간본 간행 |
편찬 시기/일시 | 1773년 - 『월헌집』 삼간본 편찬 |
간행 시기/일시 | 1773년 - 『월헌집』 삼간본 간행 |
소장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한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
성격 | 문집 |
저자 | 정수강|정자급|정수곤|정응두[삼간본 이후] |
편자 | 정옥형[초간본]|정시윤[재간본]|전라도관찰사[삼간본] |
간행자 | 정옥형[초간본]|정시윤[재간본]|전라도관찰사[삼간본]|정대의[사간본] |
권책 | 5권 3책 |
행자 | 10행 20자 |
규격 | 31.5×20.2㎝ |
어미 | 상하 화문어미(上下花紋魚尾) |
권수제 | 월헌집 |
판심제 | 월헌집 |
[정의]
전라북도 익산 출신인 조선 전기 문신 정수강의 시문집.
[개설]
『월헌집(月軒集)』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정수강(丁壽崗)[1454~1527]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542년에 처음 간행한 시문집이다. 정수강은 전라도 익산군 출신이며, 한문소설 「포절군전(捕節君傳)」을 지었다. 정수강이 타계하자 후손들이 글을 모아 문집 『월헌집』을 네 차례 간행하였는데, 특히 세 번째 간행될 때는 영조(英祖)의 어필과 전교가 내려지고 손자 정응두(丁應斗)[1508~1572]의 유고를 붙여서 세고(世稿)[한 문중에서 여러 윗대 어른들의 글을 모은 글.]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보통의 문집과는 달리 행장이나 연보 등의 부록이 실려 있지 않다.
1773년에 간행된 삼간본 『월헌집』은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
정수강은 자는 불붕(不崩), 호는 월헌(月軒)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소격서령(昭格署令)을 지낸 정자급(丁子伋)과 중랑장(中郎將) 황처성(黃處盛)의 딸 사이에서 1454년(단종 2) 태어났다. 1474년(성종 5)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477년(성종 8)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서(典校署)에 배치되었다. 1481년(성종 12)에는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83년(성종 14) 북평사(北評事), 1491년(성종 22) 사헌부정언을 지냈다
연산군 때에는 1499년(연산군 5) 사헌부장령, 1503년(연산군 9) 11월 홍문관부제학에 이르렀으나,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1506년(연산군 12) 7월 관직과 녹봉을 박탈당하였다. 그러나 1506년 가을, 연산군이 축출되고 중종이 즉위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이후 강원도관찰사, 대사간,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1518년(중종 13)에는 사헌부대사헌에 이르렀다, 1527년(중종 22) 동지중추부사로서 2월 28일 타계하였다.
[편찬/간행 경위]
『월헌집』은 네 차례 간행되었다. 초간본은 정수강이 타계하고 16년이 지난 1542년(중종 37)에 아들 정옥형(丁玉亨)이 시문을 종류별로 편집하고 간행하였다. 정수강이 평소에 글을 모아 두지 않아서 그리 많은 양이 아니었다. 책머리와 끝머리에는 정수강의 아버지 정자급(丁子伋)[1423~1487]의 유고(遺稿)와 형 정수곤(丁壽崑)[1452~1486]의 시문을 각각 붙이고, 맨 마지막에는 정옥형이 지은 발문을 수록하여 성주(星州)에서 목판본 3권으로 간행하였다.
중간본은 1702년(숙종 28)에 활자로 간행되었다. 초간본은 전란으로 대부분 유실되어서 다시 간행될 필요가 있었다. 병자호란 때 6대손 정언벽(丁彥璧)이 영남에서 『월헌집』 일부를 얻었는데, 여기에 병사(兵使) 이익형(李益亨)이 단천에서 얻은 『월헌집』의 빠진 부분을 보완하여, 7대손 정시윤(丁時潤)이 순천부사(順天府使)로 있을 때에 권유(權愈)의 서문을 받아 간행한 것이다. 이 중간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삼간본은 1773년(영조 49)에 간행되었다. 영조가 정수강의 10대손으로서 승지로 있었던 정범조(丁範祖)를 통하여 『월헌집』을 열람하고는 “전날에 『호주집』이 있는 줄 알았더니 오늘은 이런 문집이 또 있음을 듣는도다[석견호주집(昔見湖洲集) 금하문차편(今何聞此編)].”라고 열 자를 써서, 호조판서 채제공(蔡濟恭)에게 전교를 내려 자신이 쓴 글을 책의 첫머리에 붙이게 하고 전라도관찰사에게 간행하여 올리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책머리에는 영조의 어필과 전교, 『월헌집』을 중간하는 경위가 덧붙여졌다. 그리고 권5에 손자 정응두(丁應斗)[1508~1572]의 유고를 붙여서 세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삼간본 『월헌집』은 5권 3책의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사간본은 1960년에 후손 정대의(丁大懿)가 전라남도 화순군 적벽(赤壁)에서 삼간본에 간기(刊記)만을 추가하여 석인본(石印本)으로 간행하였다.
[형태/서지]
5권 3책의 목판본이다. 책의 사주(四周)에 두 개의 검은 선이 돌려진 사주 쌍변(四周雙邊)이다. 반곽의 크기는 20.6×13.1㎝이며, 10행 20자이다. 어미는 상하 화문어미(上下花紋魚尾)이며, 책의 크기는 31.5×20.2㎝이다.
[구성/내용]
『월헌집』은 5권 3책으로 되어 있다. 책머리에는 영조가 쓴 어필과 1773년 전라도관찰사에게 『호주집』을 판각하여 올리라는 전교, 1702년 12월 권유가 정수강의 행적과 문학, 문집을 간행하게 된 경위를 적은 서문, 영조의 은혜를 입어 다시 중간하게 된 「월헌집중간시말(月軒集重刊始末)」이 기록되어 있다. 권1부터 권4까지는 시(詩)이다.
권1은 부(賦) 10편, 오언절구 34수, 칠언절구 115수가 실려 있다. 부는 맑은 가을을 슬퍼하는 사(辭) 「비청추사(悲淸秋辭)」 한 편과 중국 고사에 관한 여러 편의 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언절구는 과거에 급제하기 전의 작품인 「새벽안개[曉霧]」, 「봄날의 졸음[春睡]」 두 수와 북도평사(北道評事)·증고사(證考使) 종사관(從事官) 등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마주치는 경물이나 계절의 변화에 대한 감상을 노래한 시 등이 연대순으로 실려 있다. 칠언절구는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중국 북경에 가는 도중에 지은 시, 북도평사(北道評事)와 강원도관찰사 때 지은 시를 비롯하여, 예순 살, 예순세 살을 거쳐 백발이 되어 덧없이 늙어 가는 자신을 탄식하는 시, 봉선사 승려의 시축이나 유구국 사신으로 온 승려의 시를 차운한 것이 있어서 주목을 끈다.
권2는 칠언절구 169수와 오언율시 65수가 수록되어 있다. 칠언절구는 진달래를 노래한 것부터 일흔네 살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지은 「칠십사음정해향헌하(七十四吟呈海陽軒下)」까지 주로 시대순으로 편집한 것인데, 주헌(酒軒) 김준손(金俊孫)이나 침류당(枕流堂) 이사준(李師準)과 주고받거나 차운한 시가 많다. 오언율시는 감사와 도사를 이별할 때 지은 「봉별감사도사(奉別監司都事)」부터 「만한목사부인(挽韓牧使夫人)」까지 주로 시대별로 편집하였는데 지방관을 지내면서 주변의 풍광이나 경물, 송별 등을 노래한 것과 이사준에게 보내거나 차운한 시가 많다.
권3은 칠언율시 215수가 수록되어 있다. 동방(同榜)인 충청관찰사 이세좌(李世佐)를 송별한 시로부터 율무(薏苡)를 노래한 시까지 수록되어 있다. 요동에 갔을 때, 지방관을 지낼 때, 상경하여 관직에 있을 때 교류한 인물이나 경물에 관한 시가 많다. 춘하추동 계절의 변화나 지난날에 대한 회고, 명절, 만사, 김준손이나 이사준과 주고받은 시도 꽤 된다.
권4는 오언배율과 칠언배율, 오언고시, 칠언고시로 구성되어 있다. 오언배율은 「황금대(黃金臺)」부터 「납량(納凉)」까지 8수이며, 모두 주로 경물시이다. 칠언배율은 「금릉회고(金陵懷古)」 등 3수, 오언고시는 군도에게 올린 시부터 침류당에게 부친 시까지 6수, 칠언고시는 「채련곡(採蓮曲)」 등 40수로서 서경이나 서사, 서정시 등이 골고루 수록되어 있다.
권5는 다양한 문체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당대의 명사들이 죽자 보낸 제문 아홉 편, 「포절군전(抱節君傳)」 한 편, 「만경정기(萬景亭記)」와 「취향기(醉鄕記)」 두 편, 이윤(伊尹)과 장량(張良)에 대한 논(論) 두 편, 주공(周公)이 소공(召公)을 만류하는 서(書) 한 편, 중국에 보내는 표문 세 편, 홍문관에서 『속강목집람(續綱目集覽)』의 편찬을 청한 전(箋) 한 편, 한고조가 옹치(雍齒)를 십방후(什邡侯)로 봉하는 제(制) 한 편, 제갈량이 북벌을 청하는 주(奏) 한 편, 풍년을 하례하는 섣달그믐날 축원하는 송(頌) 한 편이 수록되어 있다.
책 마지막은 부록으로, 정수곤의 「교리공유고(校理公遺稿)」, 정응두의 「충정공유고(忠靖公遺稿)」, 정옥형이 쓴 발문, 10대손 정범조와 정재원(丁載遠)이 1773년에 쓴 발문이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월헌집』은 한 집안의 4대가 쓴 글을 담고 있어서 흔치 않은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