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5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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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瓢翁遺稿 |
영어공식명칭 | Pyoongyug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양은용 |
간행 시기/일시 | 1795년 - 『표옹유고』 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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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산60-1]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운중동 490-8] |
성격 | 문집 |
저자 | 송영구 |
편자 | 송문술 |
간행자 | 송문술 |
권책 | 3권 1책 |
행자 | 1면 10행 |
규격 | 32.1×20.0㎝ |
어미 | 상하 이엽화문어미(上下二葉花紋魚尾) |
권수제 | 표옹선생유고(瓢翁先生遺稿) |
판심제 | 표옹유고 |
[정의]
전라북도 익산 출신인 조선 후기 문인 송영구의 문집.
[개설]
『표옹유고(瓢翁遺稿)』는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출신으로 조선 후기에 활동한 문인 송영구(宋英耉)[1556~1620]의 문집이다. 송영구는 성혼(成渾)의 제자이고 이항복(李恒福), 황신(黃愼), 이정귀(李廷龜) 등과 교유하였다. 『표옹유고』는 송영구의 7대손인 송문술(宋文述)이 편찬하였으며, 간행 연도는 정조 말인 1795년 무렵일 것으로 추정한다. 송영구가 죽고 나서 200년 가까이 흐른 후에 편찬한 까닭에 수록된 시문이 비교적 적은 편이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에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
송영구는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인수(仁叟), 호는 표옹(瓢翁), 일호(一弧), 백련거사(白蓮居士)이다. 아버지는 송영(宋翎), 어머니는 하세준(河世濬)의 딸이다. 송영구는 성혼(成渾)의 제자로, 1584년 친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도체찰사 정철(鄭澈)의 종사관이 되고,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충청도관찰사의 종사관이 되었다. 사헌부지평으로 있을 때 성절사로 명나라를 다녀와서는 잠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607년 성주목사가 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613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일본과 사이좋게 지낸 적이 없음을 밝힌 공로로 지중추부사가 되고, 1616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1618년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고, 인조반정 후에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전라도 전주의 서산사(西山祠)에 배향되었다.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에 있는 망모당(望慕堂)은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인데, 송영구가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이를 기리려고 고향인 익산에 1605년(선조 38)에 지은 건물이다. 망모당의 현판은 명나라의 주지번(朱之蕃)이 썼는데, 송영구와 주지번은 과거에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송영구가 사신으로 중국 북경에 머물 때, 부엌 아궁이에 불을 때던 청년이 있었는데, 그 청년이 『남화경(南華經)』을 읊고 있는 게 신기하여 물어 보니, 과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송영구가 과거를 치르는 요령을 알려 주면서 책과 돈을 건네주었는데, 그 청년이 주지번이었던 것이다. 이후 주지번이 명나라 황태손의 탄생을 알리러 온 김에 주지번은 송영구를 만나 따로 준비한 서적 여든 권을 건네주면서, 아버지를 그리워한다는 뜻 외에 스승을 그리워한다는 뜻이 중의적으로 담긴 ‘망모당’이라는 현판을 쓰게 된 것이다. 송영구를 만나러 익산으로 가다가 전주에 들러 객사의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글씨를 써 주기도 하였다.
[편찬/간행 경위]
송영구가 죽고 나서 200년 후에 송영구의 7대손인 송문술(宋文述)이 편찬하였다. 그런 까닭에 수록된 시문이 비교적 적은 편이다.
[형태/서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표옹유고』는 3권 1책의 목활자본이다. 책의 사주(四周)에 한 개의 검은 선이 돌려진 사주 단변(四周單邊)이다. 반곽의 크기는 21.9×14.2㎝이며, 10행 20자이다. 어미는 상하 이엽화문어미(上下二葉花紋魚尾), 책 크기는 32.1×20.0㎝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판본은 책의 크기와 어미에서 약간 차이가 있을 뿐이고 형태와 서지 사항은 거의 같다.
[구성/내용]
책머리의 서문은 김종수(金鍾秀)가 쓰고, 책 끝부분의 발문은 이인보(李敏輔)가 썼다. 권1과 권2에는 시문 이백일흔 수가 수록되어 있고, 잡저로 부(賦) 한 편, 서(序) 한 편, 지(誌) 한 편, 서(書) 한 편, 상량문 한 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3에는 부록으로 연보 한 편, 사제문(賜祭文) 한 편, 만(挽) 스물세 편, 신도비명 한 편이 수록되어 있다.
시문의 경우, 송영구가 전문적인 시인은 아니었고 관리로서 활동하면서 문학적인 기교보다는 솔직한 정서를 담백하게 토로하였다는 평을 듣는다. 절구, 율시, 배율, 고시 등 다양한 형식의 시문을 엿볼 수 있으며, 특히 칠언고시인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은 진나라 시인 도잠(陶潛)[도연명(陶淵明)]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갈 때 남산을 바라보며 느낀 여유로운 마음을 담은 시에서 따온 시제로, 도잠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며 대조적으로 그렇지 못한 자신의 마음을 서술한 작품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송영구가 1606년에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4월에 성주목사에 제수되어 6월에 부임하면서 지은 시이다. 다른 몇몇 작품에서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정황을 그리고 있다.
[의의와 평가]
송영구는 이항복(李恒福)·황신(黃愼)·이정구(李廷龜) 등과 함께 당대의 유학자로 손꼽힌다. 특히 망모당을 통해 익산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