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566 |
---|---|
한자 | 困庵集 |
영어공식명칭 | Gonamjip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봉곤 |
편찬 시기/일시 | 1746년 - 『곤암집』 초간본 편찬 |
---|---|
간행 시기/일시 | 1746년 - 『곤암집』 초간본 간행 |
편찬 시기/일시 | 1929년 - 『곤암집』 중간본 편찬 |
간행 시기/일시 | 1929년 - 『곤암집』 중간본 간행 |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산60-1] |
간행처 | 상운영모재(上雲永慕齋) - 전라북도 전주군 |
성격 | 문집 |
저자 | 소세량 |
편자 | 소응천 |
간행자 | 소학규|소현규|소상규 |
권책 | 1책 |
행자 | 10행 20자 |
규격 | 30.4×19.6㎝ |
어미 | 상이엽하삼엽 화문어미(上下二葉下三葉花紋魚尾) |
권수제 | 곤암선생문집(困菴先生文集) |
판심제 | 곤암집 |
[정의]
전라북도 익산 출신인 조선 전기 문신 소세량의 문집.
[개설]
『곤암집(困庵集)』은 조선 전기에 홍문관수찬, 사헌부지평, 홍문관응교 등을 역임한 소세량(蘇世良)[1476~1528]의 문집이다. 소세량의 본관은 진주소씨(晋州蘇氏)로, 소세량의 부친인 소자파(蘇自坡) 이후 대대로 전라도 익산 지역에 세거하였는데,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금마면 일대에 해당한다. 소세량이 죽고 200여 년이 지난 1746년에 후손인 소응천(蘇凝天)이 소세량의 시문을 모아 편집하여 간행하였고, 이후 1929년에 다시 후손들이 초간본을 보완하여 간행하였다. 1929년의 중간본이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
소세량은 자는 원우(元佑), 호는 곤암(困菴)·병암(屛巖), 본관은 진주이다. 1476년(성종 7) 의빈부도사 소자파(蘇自坡)와 개성왕씨(開城王氏) 왕석주(王碩珠)의 딸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문장으로 유명한 좌찬성 소세양(蘇世讓)의 형이다. 1496년(연산군 2)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서 이름난 유생들과 사귀었다.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하였으나 경서는 물론이고 역사, 문집, 소설 분야를 깊이 연구하여, 사서삼경은 보지 않고도 욀 수 있었고 문장을 지을 때는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1507년(중종 2) 32살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후 한림에 선발되어 대간과 시종신으로 있었으며, 경연에서는 강직하고 아부하지 않았다. 임금에게 아뢰는 글들은 대부분 소세량의 손에서 나오니, 소세량의 능력을 질투하는 사람이 많았다. 1516년 용담현령으로 부임하여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가혹한 형벌을 금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4년 후 홍문관수찬으로 소환되었다. 이후 이조정랑, 병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직제학, 동부승지를 거쳐 대사간으로 승진하였다. 1524년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상을 모두 치른 뒤에는 홀로 남은 어머니를 봉양하고자 남원부사를 자처하였는데, 사람은 많고 여러 가지 소송은 늘어 격무에 시달리다가 53살이 되던 1528년(중종 23) 1월에 세상을 떴다. 익산의 화암서원에 봉향되었다.
평생 책 읽기를 좋아하여 산업을 일삼지 않았고, 효도하고 우애하였다. 열 살 아래인 셋째 동생 소세양(蘇世讓)이 문학으로 이름난 것도 소세량의 가르침 때문이었을 만큼 문장이 뛰어났으나, 전하여 오는 문장이 그리 많지는 않다. 저서로는 『병암집(屛巖集)』과 『곤암집』이 전하고 있다.
[편찬/간행 경위]
소세량이 지은 글을 모아 소응천이 1746년 편집하여 초간본을 간행하였다. 후손 소학규(蘇學奎), 소상규(蘇尙奎), 소현규(蘇鉉奎) 등이 1920년에 유학자인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서문을 받아서 1929년 편집하여 재간행하였다. 이때 발문은 소학규와 소상규가 지었다.
[형태/서지]
목활자본이며, 1책 74장이다. 책의 형태는 사주 단변(四周單邊)이며 본문의 각 줄 사이를 계선(界線)으로 구분하고 있다. 반곽의 크기는 21.3×15.3㎝이고, 10행 20자, 주는 쌍행이다. 어미는 상이엽 하삼엽 화문어미(上二葉下三葉花紋魚尾)이며, 책의 크기는 30.4×19.6㎝이다
[구성/내용]
서문은 소학규의 부탁을 받고 전우가 썼으며, 소세량에 대하여 충효와 경술(經術), 신독(愼獨)을 겸한 인물로 평하였다. 이어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이 소세량이 경상관찰사의 도사가 되어 떠날 때에 지어준 「송소원우좌막영남서(送蘇元友佐幕嶺南序)」, 1748년 소응천이 지은 평이 수록되어 있다. 이어 목차가 있고, 오언절구 열여섯 수, 칠언절구 여든다섯 수, 칠언사운 마흔여섯 수, 칠언배율 한 수, 오언고시 열두 수, 칠언고시 네 수, 기행(紀行), 보유(補遺), 문(文), 부록(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경물시나 송별시, 차운시가 많다. 기행은 1524년 7월 21일부터 동생 소세양과 함께 구례에 계신 부모를 뵈러 가는 길에 쓴 글이다. 7월 21일 양재를 출발하여 천안, 소사, 전의, 공산, 판현, 여산, 삼례, 전주, 상관을 거쳐 8월 7일 구례에 도착하여 부모님을 뵈었으며, 10일 다시 율현(栗峴)을 넘어 지리산 봉천사에서 숙박한 일정을 기록하고 있다.
보유는 다섯 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두 편은 제목이 없는데, 배를 타고 유람할 때 지은 칠언율시와 옛 추억을 되새기며 술을 마시는 오언율시이고, 제목이 있는 「알선릉(謁宣陵)」, 「기이백익(寄李伯益)」, 「희증기승현희(熙贈期僧玄熙)」는 칠언율시이다.
문(文)은 다섯 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문과에 급제하여 상경한 아들 소봉(蘇逢)에게 관직에 열심히 봉사하되 빈곤함을 잘 견디라고 격려하는 편지, 아우 소세검(蘇世儉)이 영남으로 유람하러 갔을 때 보낸 글, 홍문관 이수찬(李修撰)이 죽었을 때 보낸 제문, 관찰사 이언호(李彦浩)에게 보낸 제문 등이다. 부록은 아우 소세양이 지은 소세량의 묘갈명, 종증손 소동도(蘇東道)가 지은 유사(遺事) 등이 수록되어 있다. 책 끝머리에는 1929년 후손 소학규와 소상규가 지은 발문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