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5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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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省齋遺稿 |
영어공식명칭 | Samseongjaeyug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재룡 |
[정의]
전라북도 익산 출신인 조선 후기 한학자 소상열의 한시집.
[개설]
『삼성재유고(三省齋遺稿)』는 조선 후기의 한학자인 소상열(蘇祥說)[1652~1694]의 문집이다. 소상열의 진주소씨(晋州蘇氏) 집안은 대대로 전라도 익산 땅에 세거하였는데,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금마면 일대에 해당한다. 『삼성재유고』는 소상열이 지은 한시와 상소문, 서간문 등을 엮어 1935년 5권 1책의 목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전라북도 익산시 신용동에 있는 원광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
소상열은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출신이다. 호는 삼성재(三省齋),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아버지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한 소두산(蘇斗山)이다. 삼성재의 ‘삼성’은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吾身)’에서 온 말로, 자신에게 잘못한 점이 없는지 하루에 세 번씩 스스로 돌아보고 살펴본다는 뜻이다.
[편찬/간행 경위]
『삼성재유고』는 소상열의 후손 소상영(蘇祥永)이 편찬 및 간행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소상영은 『삼성재유고』의 서문(序文)을 후손 소학규(蘇學奎)에게 청하였으며, 을해년인 1935년 5월 상순에는 문중의 어른들과 논의하여 간행을 위한 각자(刻字)를 의뢰하였다. 간행 목적으로는 소상열의 글을 오래도록 전하여 후손들이 선조의 깊은 뜻을 영원히 지켜 가길 바라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형태/서지]
5권 1책의 목활자본이다. 책의 사주(四周)에 두 개의 검은 선이 돌려진 사주 쌍변(四周雙邊)이며 본문의 각 줄 사이를 계선(界線)으로 구분하고 있다. 반곽의 크기는 21.7×16.6㎝이며, 10행 20자이다. 주는 쌍행(雙行)이며, 어미는 내향 삼엽화문어미(內向三葉花紋魚尾), 책 크기는 31.1×20.6㎝이다.
[구성/내용]
권1에는 절구(絶句)와 율시(律詩)를 포함하여 예순한 수가 실려 있으며, 권2에 상소문 세 편, 권3에는 서간문 열두 편, 권4 잡저(雜著)에는 「송왕자안부남창연시(送王子安赴南昌宴詩)」와 「시의입아증민막비이극(詩義立我蒸民莫非爾極)」, 논평문(論評文) 두 편이 실려 있으며, 마지막 권5는 부록으로, 소상열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祭文) 다섯 편과 만사(輓詞) 서른세 수, 가장(家狀) 한 편, 발문(跋文) 세 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소상열이 지은 시와 세 편의 상소문에서는 저자의 올곧은 선비 기질이 잘 드러난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무고(誣告)함을 밝히고자 쓴 변론의 상소와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제사를 올리지 못하게 위패를 치워 버림]된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다시 배향하게 하여 줄 것을 주장한 상소, 그리고 조사기(趙嗣基)의 목을 벨 것을 주장한 상소 등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선비의 기상이 엿보인다.
아울러 『삼성재유고』를 통하여 당시 익산 출신 인물들의 활동을 또한 엿볼 수 있는데, 송시열의 무고 변론에는 소상열이 상소를 짓고, 유준(柳浚)이 필사하며, 김수견(金守堅), 소상시(蘇相時), 유속(柳涑), 이광저(李光著), 정개경(鄭蓋卿), 최흥조(崔興祖), 황도항(黃道恒) 등이 읽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이이와 성혼을 다시 배향하게 하여 줄 것을 주장한 상소, 그리고 조사기의 목을 벨 것을 주장한 상소에는 소상열이 짓고, 소홍원(蘇弘遠), 유경(柳灝), 이주(李㴻), 최도일(崔道一), 최흥조(崔興祖) 등이 썼음을 밝히고 있다.
[의의와 평가]
『삼성재유고』를 통하여 소상열이 하루에 세 번 자신을 돌아보고 살펴보는 삼성의 자세를 지닌 선비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상소문은 올곧은 선비 정신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아울러 상소에 적힌 인명 등을 통하여 당시 익산 지역 인물들의 활동을 고찰할 수 있어 역사 자료적 가치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