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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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艮齋先生遺蹟 |
영어공식명칭 | Sir Ganjae's Historic Sit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현동길 29-30[기산리 산3]|현동길 29-12[기산리 77-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성미 |
조성|건립 시기/일시 | 1922년 - 간재선생 유적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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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4년 9월 27일 - 간재선생 유지 전라북도 기념물 제23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4년 4월 15일 - 간재선생 유적 익산시 향토유적 제14호 지정 |
현 소재지 | 간재선생 유적[묘역] -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현동길 29-30[기산리 산3] |
현 소재지 | 간재선생 유적[현산재] -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현동길 29-12[기산리 77-1] |
성격 | 묘|제각 |
양식 | 맞배지붕 |
관련 인물 | 전우 |
면적 | 816㎡[묘역]|2,446㎡[현산재 1동] |
소유자 | 담양전씨 야은파 중 전우간재공파 종중 |
관리자 | 간재파 종중 전계성 |
문화재 지정 번호 | 익산시 향토유적 제14호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기산리에 있는 근대기 유학자 전우의 묘역과 제각.
[개설]
간재선생 유적(艮齋先生遺蹟)은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기산리에 있는 근대 성리학자 간재 전우(田愚)[1841~1922]의 묘역과 현산재를 말한다. 간재 전우는 82세에 사망한 후 익산 선영에 묻혔다. 전우의 초명은 전경륜(田慶倫)·전경길(田慶佶)이며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추담(秋潭)·간재(艮齋)·고옹(蠱翁)·양하왕인(陽下尫人)이다. 본관은 담양(潭陽)이며 전주 출생으로 야은 전녹생(田祿生)의 16대손이다. 율곡 이이(李珥)와 우암 송시열(宋時烈)로 이어지는 기호학파를 계승한 성리학자로 1905년 을사늑약 때 오적을 참수하기를 상소하고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공자의 뜻을 취하고자 해도로 들어가 연구와 후진을 양성하며 항일 정신 고취 및 민족 정기를 드높이기 위하여 힘썼다.
임헌회(任憲晦)의 문인인 전우는 오진영(吳震泳)·최병심(崔秉心)·이병은(李炳殷)·송기면(宋基冕)·권순명(權純命)·유영선(柳永善)·김병준(金炳駿)·김택술(金澤述) 등 3,000여 명의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안자편(顔子篇)』·『연원정종(淵源正宗)』·『간재집』·『간재사고(艮齋私稿)』 등을 저술하였다. 전우의 장례식에는 영구를 따르는 사람이 2,000여 명이었고 6만여 명의 인파가 모였다고 전한다. 간재선생 유적은 2014년 4월 15일 익산시 향토유적 제14호로 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간재선생 유적은 묘지와 추모 공간인 현산재를 간재선생 사후 종중에서 조성하였다.
[위치]
간재선생 유적 중 묘역은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기산리 산3에 있다. 현산재는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기산리 77-1에 있다. 마을 입구 왼쪽 좁은 도로로 30여m쯤 가면 도로 바로 옆에 현산재가 있다. 현산재로부터 좁은 도로를 따라가면 산길 입구에 작은 표지판이 나오는데 돌 축대 옆 계단을 올라가면 간재 전우의 묘소가 있다.
[형태]
간재선생 유적 중 현산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집이다. 현판 글씨는 전우의 제자인 유재 송기면의 아들 강암 송성용이 썼다. 묘역에는 신도비와 묘비, 묘 2기가 있다.
[현황]
간재선생 유적은 익산시 향토유적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산길 초입의 간재선생 묘역 왼쪽에 신도비와 묘비가 묘소 앞에 있고 오른쪽 아래에는 ‘유인경주정씨지묘’가 있다. 간재 전우의 묘 정면에는 상석이 있고, 오른쪽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비에는 ‘간재선생지묘(艮齋田先生之墓)’라 새겨 있으며 전면 양쪽에는 망주석이 세워져 있다. 주변에는 담양전씨 묘가 모여 있으며 5기가 간재선생 직계 가족 묘이다. 묘비에는 ‘임술칠월사일유시(壬戌七月四日酉時)’에 계화도에서 사망하여 같은 해 ‘구월임신대장우익산현동(九月壬申大葬于益山玄洞)’이라 쓰여 있어 1922년 9월 묘를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묘비명은 1946년 짓고 1986년 세웠다.
간재선생 영정각에는 ‘현산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1922년 건립되었다고 하나 근거가 불분명하며 개보수가 이루어져 시멘트기와 함석차양 등이 설치된 상태이다. 현산재 앞 왼쪽에 간재선생 추모비가 있다. 현산재는 담과 문이 없는 열린 공간으로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묘역은 관리가 되어 있지 않아 수풀이 무성하다.
[의의와 평가]
간재 전우는 전통적인 유학 사상을 실현시키고자 하였으며 성리학 연구 업적이 높이 평가되어 조선 시대 최후의 정통 유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해도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고,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간재선생 유지[전라북도 기념물 제23호]는 전라북도 부안 계화도에 있으나 묘소와 현산재는 익산에 있다. 그러므로 간재의 활동지와 연계하여 익산에 있는 간재 유적을 더욱 알릴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