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4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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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杜洞敎會舊本堂 |
영어공식명칭 | Dudong Church Old Main Hall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두동길 17-1[두동리 385-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양은용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3년 - 두동교회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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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1929년 - 두동교회구본당 신축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64년 - 두동교회 예배당 건립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2년 4월 6일 - 두동교회구본당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9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두동교회구본당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현 소재지 | 두동교회구본당 -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두동길 17-1[두동리 385-1] |
성격 | 목조 교회 |
양식 | ㄱ자 교회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3칸 |
소유자 | 두동교회 |
관리자 | 두동교회 |
문화재 지정 번호 |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두동리에 일제 강점기 교회 건물.
[개설]
두동교회는 1923년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두동리의 부호 박재신의 사랑채에 설립되었다. 당시 박재신은 마을에 박재신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지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부유했다. 또한 사재를 털어 마을 사람들의 세금을 대납하거나, 마을에 기근이 들면 빈민들을 구제하는 등의 선행을 펼쳐 마을 입구에 비석이 세워질 정도로 평판이 좋았다. 박재신은 가족들이 인근의 부곡교회를 다니는 것을 묵인하였는데, 대대로 손이 귀한 집안에서 박재신의 부인이 임신을 하자 이에 감복하여 자신의 집 사랑채를 예배 공간을 내주었다. 하지만 박재신의 아들이 5세에 병사(病死)한데다 고모상의 절차를 두고 전도사와 마찰을 빚자, 박재신은 집에서 신자들을 모두 내쫓았다.
대다수가 박재신의 소작농이었던 두동마을 신자들은 결국 자생적으로 교회를 유지할 방안을 모색하였고, 간신히 박재신의 땅이 아닌 마을의 채소밭을 구하여 교회의 터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예배당을 지을 돈이 없어 걱정하던 중 1929년 안면도 소나무를 실은 배가 군산 앞바다에서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소나무들이 성당포까지 떠내려 오자 신자들은 헐값에 소나무들을 사들였고, 마침내 교회의 예배당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현재의 두동교회구본당 건물이다. 두동교회구본당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9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위치]
두동교회구본당은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두동리 385-1 두동교회에 있다.
[변천]
두동교회는 1933년까지 성영학원을 운영하며 일제 강점기에 독립 정신을 가르쳤으며 강대상 밑에 공간을 두어 설교 중 순사가 오면 몸을 숨길 수 있도록 하였다. 한국전쟁 때에는 인민위원회 사무실이 들어섰지만, 교회 마룻장 아래 작은 밀실을 만들어 청년들이 급히 몸을 숨기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두동교회구본당은 1964년 5월 현재의 예배당이 건립되기 전까지 본당 건물로 활용되었다. 두동교회구본당은 2002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9호로 지정되었으며, 2011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지정 한국기독교 사적 제4호로 지정되었고, 201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익산노회 지정 제1호 익산노회사적지로 지정되었다.
[형태]
두동교회구본당은 독특한 ㄱ자 형태의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구조이다. 회중석을 직각으로 꺾어서 남자 예배석과 여자 예배석을 각각 구성하였다. 두 축이 만나는 위치에 강대상이 놓여 있다. 강단은 한 칸 정도의 크기이며, 남녀 예배석은 세 칸 정도로 크기가 같다. 전면 기준으로 남북 축이 남자석, 동서 축은 여자석이다. 각각의 출입문이 있어 입장 시 남녀를 구분하였다. 바닥은 장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강대상 전면의 팔각기둥은 건물의 회첨부를 받치는 동시에 예배 시 휘장을 쳐서 남녀가 서로를 볼 수 없게 하였다. 지붕은 홑처마 우진각의 형태이며, 지붕의 재질은 골함석이다.
[현황]
두동교회구본당은 1964년 두동교회의 현 예배당이 건립되기 전까지는 예배당으로 활용되었으나, 현재는 두동교회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전시관으로 주로 활용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두동교회구본당은 독특한 ㄱ자 형태의 구조 때문에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두동교회를 통하여 초기 기독교 전파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데,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아래 남자와 여자의 평등을 주장하였으나, 두동교회의 건물을 통하여 흔히 ‘남녀칠세부동석’으로 상징되는 ‘내외법(內外法)’의 존재와 유교적 사상이 남아 있던 시대적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두동교회구본당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당시 기독교 전파 과장에서 토착 문화를 인정하고 자립적인 선교를 표방하였던 ‘네비우스 선교 정책[Nevius Mission Plan]’의 영향이 컸다. 그 결과 두동교회구본당은 초기 한국 교회 건축만이 가진 독특한 유형으로 볼 수 있다. 현재 국내에는 ㄱ자형 교회가 2개 남아 있는데, 다른 하나는 김제의 금산교회이다. 하지만 남자 공간이 여자 공간에 비해서 컸던 금산교회와 달리 양쪽 공간을 동일한 크기로 조성한 두동교회는 금산교회의 조성 과정보다 진일보한 남녀 인식을 보여 준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