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4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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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礪山東軒 |
영어공식명칭 | Yeosan Government Office |
이칭/별칭 | 근민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동헌길 13[여산리 445-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안선호 |
건립 시기/일시 | 1662년 - 여산동헌 중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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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806년 - 여산동헌 중수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58년~1989년 - 여산동헌 양로원으로 사용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0년 3월 8일 - 여산동헌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3호 지정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89년 - 여산동헌 평면, 벽체, 창호 등 개조된 부분 원형 복구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2011년 - 여산동헌 실측 조사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여산동헌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
현 소재지 | 여산동헌 -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동헌길 13[여산리 445-2] |
성격 | 관아 건물 |
양식 | 조선 후기 익공 양식 |
정면 칸수 | 5칸 |
측면 칸수 | 3칸 |
소유자 | 여산양로당 |
관리자 | 양로당대표 |
문화재 지정 번호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동헌 건물.
[개설]
여산은 조선 초기 여량과 낭산을 합쳐 여산현이 되었다. 1436년(세종 18)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의 고향이라 하여 군(郡)으로 승격되어 충청도에 속하였다가, 1444년(세종 26) 다시 전라도로 복귀되었다. 1699년(숙종 25) 단종 비 정순왕후의 관향(貫鄕)이라 하여 여산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895년 행정 체제 개편에 따라 다시 군으로 강등되었다.
여산동헌(礪山東軒)은 여산 관아 건물 중에서 수령의 집무 공간으로 사용하던 건물이며, ‘근민헌(近民軒)’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여산 관아는 1866년 병인박해 때 고산, 금산, 진산 등 깊은 산중에 숨어 살다가 잡혀 온 천주교 신자들을 가혹하게 처형하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여산동헌 앞에는 얼굴에 물을 뿌리고 백지를 여러 겹 붙여 질식사시키는 백지사형을 하였던 백지사터가 있다.
[위치]
여산동헌은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소재지의 당제산(堂祭山) 아래에 있다. 여산파출소에서 여산초등학교 방향으로 가다가 여산면사무소를 지나면 왼쪽에 있다.
[변천]
여산동헌은 중수 편액에 1662년(현종 3) 당시 여산의 수령이었던 여태재(呂台齊)가 건립하고, 1806년(순조 6) 중수하였다고 적혀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면사무소로 사용되었으며, 1958년 면사무소가 이전하면서 여산노인회에서 1989년까지 양로원으로 사용하였다. 1989년 평면, 벽체, 창호 등 개조되어 있던 부분을 원형대로 복구하였다. 1980년 3월 8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3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여산동헌은 뒤쪽이 높고 앞쪽이 낮은 경사진 지형 조건에 맞춰 건물을 세웠다. 잘 다듬은 화강석을 사용하여 기단을 낮게 조성하고 앞쪽에는 높은 주춧돌을 세워 건물의 위계를 강조하였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왼쪽 2칸은 방이고, 오른쪽 3칸은 대청이며 앞쪽 툇마루는 개방하였다. 기둥은 원기둥을 사용하였는데 기둥 상부는 창방[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부재]을 설치하지 않고, 첨차와 익공을 결구하여 주두와 함께 직접 장여와 보를 받치도록 하였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팔자(八字)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현황]
여산 관아에는 ‘진남루’라는 누문(樓門)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들이 존재하였으나 현재는 동헌만 남아 있다. 여산동헌의 동쪽에는 여러 기의 선정비와 불망비를 비롯하여 대원군 때 설치한 척화비가 있다. 그리고 여산동헌 앞마당에는 수령이 6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여산동헌의 느티나무[전라북도 기념물 제116호]가 있다. 여산동헌 남쪽 담장 밖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백지사(白紙死) 터가 있다.
[의의와 평가]
여산동헌은 전국에 걸쳐 얼마 남지 않는 조선 시대 지방 관아 건물 중 하나이다. 조선 시대 동헌의 건축 형식을 잘 보여 주며 건축 수법이 특색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