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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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澄碧池石刻 |
영어공식명칭 | Jingbyeokji Pond Stone Carvi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금마4길 38[동고도리 15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양은용 |
조성|건립 시기/일시 | 1668년 - 징벽지 석각 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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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 시기/일시 | 일제 강점기 - 징벽지 석각 장벽지 폐호 |
이전 시기/일시 | 1945년경 - 징벽지 석각 이전 |
현 소재지 | 금마초등학교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금마4길 38[동고도리 155] |
원소재지 | 익산군관아터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
성격 | 석제 조각 |
관련 인물 | 송시도|송시열|이시담 |
소유자 | 익산시 |
관리자 | 익산시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익산군수 송시도의 석각(石刻).
[개설]
징벽지 석각(澄碧池石刻)은 1668년 익산군수였던 송시도(宋時燾)[1613~1689]가 징벽지 훈호당 옆 돌에 ‘징벽지(澄碧池)’라는 글을 쓰고 새긴 것이다. 송시도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동생이다. 훈호당(壎箎堂)은 송시도가 선정을 베푼 명관 이시담(李時聃)[1584~1665]을 기려 지은 것인데, ‘훈호’는 ‘훈지’라고도 읽는다. “나발과 피리가 어울리듯 화기애애하게 지낸다.”라는 뜻이다.
건물 이름에 대한 이해가 분분한데,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에 「익산훈호당기」가 남아 있어, 징벽지에 훈호당을 건립한 당시의 정황을 전해 준다. 송시열, 송시도 형제가 연달아 익산군수를 지낸 것을 나발과 피리가 어울리듯 아름답게 어울린다는 말로 드러냈음을 밝히고 있다. 송시열은 형과 아우가 이룬 성과를 기리고 싶은 마음에 당기를 쓰기는 하였으나 관청 건물에 개인 형제간의 우애를 기리는 당호를 쓰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글의 말미에 “[훈호라는] 당호를 쓴 것은 한 집안의 사사로운 일인데, 그것을 공관에 달아 놓은 것은 논란을 불러 올 만하다. 그렇지만 형제의 윤리는 천하에 통용되는 공공의 이치이니, 천하에 어찌 윤리 밖의 사람이 있겠는가. 뒤에 후임자는 한 사람의 사사로움이라 여기지 말고 미루어 넓혀서 백성을 교화한다면[중략] 위정의 근본에 가깝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징벽지는 일제 강점기에 메워지고 훈호당도 사라졌으면 현재는 징벽지 석각만 남아 있다.
[건립 경위]
송시도는 익산군수로 부임한 뒤 관아의 건물이 허름하여 대대적으로 중수하면서 징벽지와 훈호당을 세웠다. 송시도는 명관 이시담을 기려 훈호당을 짓고, ‘징벽지’라는 글씨를 써서 돌에 새겼다. 당 이름의 ‘호(篪)’는 긴 대나무를 뜻하는데, 피리라는 뜻의 지(篪)로도 읽어, ‘훈지당’으로도 통용된다.
[위치]
징벽지 석각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155 금마초등학교에 있다. 1945년경 금마초등학교가 옛 익산군 관아터에서 동고도리로 이전할 때 징벽지 석각도 함께 이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
징벽지 석각은 바위 단면에 ‘징벽지(澄碧池)’라 새긴 글씨가 남아 있다.
[현황]
징벽지와 훈호당은 일제 강점기에 사라지고 징벽지 석각만 금마초등학교에 남아 있다. 징벽지가 있던 자리에는 금마시장이 들어서 있다.
[의의와 평가]
징벽지 석각은 송시열, 송시도 형제의 우애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