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3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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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城廓 |
영어공식명칭 | Castl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이병호 |
[정의]
전라북도 익산 지역에 남아 있는 도시나 마을을 지키기 위한 전통 시대 방어 시설.
[개설]
성곽(城廓)은 전라북도 익산군 지역에 남아 있는 도시나 마을을 지키기 위한 방어 시설이다. 익산 지역에서는 왕궁리 유적을 방어하기 위한 성곽인 익산 토성[오금산성]을 비롯하여 모두 13곳에서 성곽이 확인되었으며, 주로 백제 시대 성곽이 많다. 금강 연안의 함라산 일대와 미륵산과 용화산이 있는 금마면 일대, 그리고 동쪽 천호산 일대에 주로 성곽이 분포하고 있다. 금마면 일대에는 가장 많은 성곽이 축조되었는데 미륵산을 중심으로 북쪽의 익산 낭산산성을 시작으로 선인봉산성, 용화산성[주성], 용화산성[부성], 금마도토성, 익산 토성 등이 원형을 이루고 있다. 그 밖에 용안면과 함열면에는 조선 시대에 축성한 용안읍성과 용산성이 있다.
[성곽의 축조 방식]
익산 지역의 성곽은 산봉우리를 성벽으로 둘러싼 테뫼식과 계곡 부분을 둘러싼 포곡식이 모두 확인되는데, 테뫼식이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산성의 규모는 700m 이하의 소형이 대부분이다. 금강 연안의 함라산 일대, 미륵산의 금마면 일대의 산맥을 따라 산성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사실은 당시의 교통로와도 연관이 깊은 것으로 추측된다. 성곽을 축조하는 재료는 돌이나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한 석축 및 토석혼축이 모두 확인된다. 백제 때 축성한 것이 확실시되는 금마도토성과 낭산산성, 익산 토성 등에서는 판축 기법과 더불어 백제 사비기의 수막새와 문자기와가 공통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익산 토성과 금마도토성]
익산 토성은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의 중간, 쌍릉의 북쪽에 있는 해발 125m의 오금산 정상부와 남쪽 작은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둘레는 약 690m에 이른다. 익산 토성은 일명 오금산성 또는 보덕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1984년 발굴 조사에서 남문지를 비롯하여 정상부에서 집수정이 확인되었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정상부와 서성벽을 중심으로 한 연차 조사에서는 주춧돌을 사용한 건물지와 굴립주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초석건물지 아래에 굴립주건물지가 있는 것이 층위적으로 확인되었다. 서성벽의 중앙부에서는 새롭게 서문지가 확인되었는데 서문지는 후대에 폐쇄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 성벽의 기초부가 기존에 알려진 흙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돌로 석축한 석성으로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왕궁리 유적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한 수부(首府)명 문자기와를 비롯하여 부여 관북리 유적 등에서 출토된 북사(北舍)명 토기편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금마도토성은 금마면 소재지 북쪽에 있는 해발 87m의 성황산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484m 내외이다. 금마도토성은 일명 돗토성으로 불리며 한자로 ‘저토성(猪土城)’으로 쓰기도 한다. 몇 차례의 시굴 조사를 통하여 판축 기법이 활용된 토성이라는 것이 밝혀졌는데 서성벽 일부 구간에서는 석축이 확인되어 후대에 수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출토 유물로는 백제 사비기의 특징적인 문자기와를 비롯하여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의 기와편이 수습되었다.
[익산 낭산산성과 익산 미륵산성]
익산 낭산산성은 미륵산에서 북쪽으로 약 4㎞ 떨어진 해발 162m의 낭산 정상부에 있는데 일명 마한성(馬韓城)으로 불린다. 익산 낭산산성은 낭산의 남북 방향 능선과 서쪽 골짜기를 감싸는 산정식(山頂式)에 가까운 형태로 둘레는 약 870m 내외이다. 발굴 결과 남문지와 성벽, 수구(水口) 등이 확인되었고, 출토 유물은 백제부터 조선 시대에 걸치는 다양한 종류의 기와, 토기, 자기 파편이 출토되었다. 특히 왕궁리 유적과 익산 토성에서만 출토된 바람개비 문양 수막새가 다수 출토되어 상한이 백제 말기까지 소급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익산 미륵산성은 미륵사지 북쪽에 있는 해발 430m의 미륵산 정상부와 북쪽 봉우리를 잇는 능선을 비롯하여, 각 능선과 능선 사이의 계곡부를 감싼 포곡식 산성이다. 산성의 둘레는 약 1,776m로 익산 지역 성곽 중에는 가장 크다. 『고려사』나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는 “기준(箕準)이 처음 쌓았으며 기준성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발굴 결과 동문지와 남문지를 비롯하여 10개소의 치(雉)와 집수 시설, 각종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금마저성(金馬渚城)’이나 ‘금마저와요점(金馬渚瓦窯店)’이 새겨진 문자기와가 주목된다. 발굴 유구와 출토 유물을 종합하여 볼 때 익산 미륵산성은 통일신라 시대에 처음 축성되어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까지 이용되다가 조선 후기에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익산 지역에서 발견된 성곽들은 서해에서 금강을 통하여 내륙으로 이동하는 교통의 요충지에 일정한 간격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이러한 분포 양상은 익산이 가진 지정학적 특성을 잘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