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C010301 |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도장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옥희 |
민간인 집단학살 | 1951년 3월 15일 - 도장 마을에서 민간인 집단학살이 벌어졌다. |
---|---|
제1회 민간인 학살 합동 위령제 | 2011년 3월 14일 - 도장 마을회관 일원에서 제1회 민간인학살합동위령제를 지냈다. |
제2회 민간인 학살 합동 위령제 | 2012년 3월 2일 - 도장 마을회관 일원에서 제2회 민간인학살합동위령제를 지냈다. |
제3회 민간인 학살 합동 위령제 | 2013년 3월 22일 - 도장 마을 일원에서 제3회 민간인학살합동위령제가 열렸다. 능주씻김굿 보유자인 박정여 할머니가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했다. |
마을지 | 고당산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
마을지 | 해망산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
마을지 | 도포배미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
마을지 | 도장 마을회관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
마을지 | 도장 마을회관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
마을지 | 나순례 옛집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
마을지 | 삿갓봉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
[민간인 학살자들을 위한 합동 위령제]
2011년 3월 14일[음력 2월 10일]에 도장 마을 회관 앞에서 민간인 학살 희생자를 위한 첫 합동 위령제가 열렸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마을 바로 앞에 위치한 도포배미 논에서 마을 주민들 18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다. 합동 위령제 추진 위원회는 위령제가 학살이 있은 뒤 60년 만에 처음 열리는 만큼 6·25 전쟁 때 도장리 뿐만 아니라 도암면 일원에서 군·경이나 좌익에 의해 학살된 주민들의 넋도 함께 달래 화해와 상생의 장으로 만들어가기로 했다.
“부끄럽고 안타까운 역사이지만 이제는 당시 그 참혹했던 사실을 생생하게 밝히고 역사의 한 장에 분명하게 기록해 후대에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당시 처참하게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의 희생을 통해 새삼스럽게 전쟁의 참상을 되새겨보고 평화의 소중함과 인권의 가치를 생각해보는 자리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형선근)
이날 위령제는 추모식, ‘전통 제례 진혼굿’ 등으로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랬으며, 참석자 모두가 학살현장인 논으로 이동하여 묵념과 헌화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했다. 다시는 이러한 역사적인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기원하는 주민들의 염원이었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 공화국]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도장 마을도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도장 마을은 당시 전남 빨치산의 최후 근거지이기도 했던 장흥군 유치면과 인접한 지역인데다 고당산과 해망산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었기 때문에 산을 활동근거지로 하는 빨치산들의 출입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산사람, 혹은 반란군이라고 불리는 빨치산들이 마을에 내려와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강탈했고,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협박과 회유에 이끌리어 산으로 올라갔다. 빨치산들은 10세에서 15세 사이의 소년들을 모아서 소년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단원들에게 민족해방운동가와 연극 등을 학습시켰다. 또한 빨치산 대원들에게 공급할 장갑이나 양말을 미영실로 만들도록 주문했다고 한다. 국군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산꼭대기에 봉화를 피우는 일도 소년단원들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인민군들이 주로 밤에 마을을 찾았다면 낮에는 국군들이 찾아왔다. 국군은 인민군들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다. 사실 주민들은 무장한 산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낮에 국군이 찾아오면 인민군들에게 물자를 제공한 사람을 찾아내 죽이거나 보복을 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피해 산으로 피신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토벌대와 빨치산 사이에 전투가 발생하면 공연한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때의 혼란스러웠던 상황에 대해 형재환 씨는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경찰들이나 군인들이나 모두 피난 나오면 저 산으로 도망가가꼬 총맞어 죽기도 하고. 집을 비우라고 하면 안 비우면 죽은게 전부 가족들이 도망을 나가 저 산중으로. 글다가 그냥 작전부대들 만나불면 이쪽 저쪽 만나불면 전쟁 벌어져불믄 여기 저그다 쏴분께 피난댕기다 글로 절로 죽었고.”(형재환)
낮에는 국군들한테 시달리고 밤에는 빨치산들한테 시달렸던 도장 마을 사람들의 고통이 절실하게 묻어난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 공화국’ 상황이 된 것이다.
[무고한 마을 주민 18명이 한꺼번에 총살 당하다]
이런 날들이 계속되고 있던 1951년 3월 15일 이른 새벽이었다. 국군 부대가 해망산을 거쳐 삿갓봉으로 내려왔다. 마을에 들어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모든 주민들에게 당장 집 밖으로 나오라고 고함을 쳤다. 일명 삐아루 부대라고 불렸던 국군 11사단 20연대 병력이었다. 그들은 집안에 남아있는 자는 다 죽이겠다고 하며 여기저기에 총을 쏘았기 때문에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밖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전날 도장 마을에서는 빨치산 간부급들의 작전회의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 중에 인민군 간부급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주민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도장 마을이 회의 장소로 선택된 것이다. 그런데 그 소식이 국군에게 알려지면서 ‘도장 마을은 공산당 마을이다’라는 낙인이 찍혔고 바로 다음날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국군은 밖으로 나온 마을 사람들을 도포배미에 집결시켰다. 실제로 이날 그 자리에 끌려 나간 김범순 씨는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국군들에게 쫓겨 마을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도포배미로 끌려갔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을 한군데 모아놓은 뒤 소대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주민들을 두 편으로 나누었다. “대한민국에 공이 있다거나, 경찰 가족이라든가, 군인 가족은 도포배미 바로 위쪽으로 난 길 위로 올라가라”고 명령했다. 김범순 가족은 자신의 큰 형님이 경찰 신분으로 여순반란사건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길 위로 올라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일부 주민들이 길로 올라가자 군인들은 논에 남은 사람들에게 무차별 기관총을 쏘기 시작했다.
무고한 마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그때 학살이 일어난 도포배미 가까운 곳에 살고 있던 고 나순례가 아기를 들쳐 업고 국군에게 달려들어 총부리를 잡고 막아섰다. 나순례의 서슬에 놀란 국군은 총 쏘기를 멈추었다. 마침내 국군들은 주민들을 향해 겨누고 있던 총부리를 아래로 내려놓았다. 이미 10살 먹은 어린 아이를 포함해 18명이 목숨을 잃은 후였지만 나순례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더 많은 주민들이 무고하게 목숨을 잃었을는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국군들이 주민들에게 도곡으로 피난가 있으라고 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시신을 수습하지도 못한 채 거적으로만 덮어두고 마을을 떠났다. 후에 다시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은 정식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시신을 대발쌈[대나무로 이엄을 엮은 관] 해서 땅에 묻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주민들은 오래도록 그때의 상처를 잊지 못했다. 해가 지고 나면 그곳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말도 있었고, 귀신이 나온다는 말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지날 때 마다 가슴 한 편이 저려왔다. 하지만 오래도록 진실은 규명되지 못한 채 역사의 상흔으로 존재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날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나순례에 대한 고마움을 가슴 깊이 담아둘 뿐이었다.
그로부터 60여년이 흐른 후에야 이 사건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졌다. 당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에서 도장리 희생자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졌고 2009년에 마침내 무고한 민간인 학살이었음이 사실로 확인됐다. 무고한 민간인들이 국군에 의해 학살된 사건이었음이 규명되면서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도 함께 이뤄졌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2011년 첫 민간인 학살 위령제가 열린 이후로 2013년까지 위령제는 계속되고 있다. 특히 2013년에는 화순군 향토 문화유산 제55호 지정된 능주 씻김굿 보유자인 박정녀 할머니가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의 진상 규명 결과를 토대로 2012년에는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여 2013년 드디어 국가로부터의 배상판결을 받아내기도 했다. 주민들은 이러한 행사를 치르면서 다시는 이 마을에, 이 땅에 그런 비극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
[정보제공]